"유무죄 여부·형량 제시 않는 백지 구형 적법하지 않다"
수사기록 남지 않은 경우의 고육책, 증거조작 드러나도 남발해 와 문제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해 달라.”
과거사 재심 사건의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유무죄 여부 및 형량에 대해 이 같은 의견을 종종 진술해 왔다. 통상 ‘징역 ○년을 선고해 달라’는 진술과는 다른, 이른바 ‘백지 구형’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를 두고 “공소권을 행사했던 검찰이 마지막 순간, 책임과 의무를 회피해 버리는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그런데 이러한 관행에 법원이 강하게 제동을 걸면서, 검찰의 백지 구형이 앞으로 사라지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61년 반공임시특별법 위반죄로 징역 15년이 선고된 고(故) 윤길중 진보당 간사장의 유족이 낸 재심 사건에서 “백지 구형을 하라”는 상부 지시를 어기고 무죄 구형을 했던 임은정 검사가 낸 징계취소 소송의 항소심 재판부가 6일 “백지구형은 적법하지 않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1심 재판부도 “정직 4개월은 지나치다”고 판단했지만 백지 구형에 대해선 “사실상 무죄 구형과 마찬가지인 적법한 구형”이라고 했었다.
사실 검찰이 모든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백지 구형만 하는 것은 아니다. 7일 검찰에 따르면 과거사 사건 구형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과거의 수사기록과 현재 새롭게 드러난 정황들을 모두 검토하더라도 유죄라는 판단이 들 땐 유죄 구형을 고수한다. 1991년 정국을 뒤흔들었던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의 재심이 열린 올해 1월, “강씨의 항소를 기각해 달라”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강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까지 했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 재심 무죄에 대해서도 검찰은 상고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무죄 구형을 하기도 한다.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기소된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등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다. 기소 근거가 됐던 긴급조치 9호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거나, 기소 당시의 증거가 고문 등으로 조작된 게 명백할 때는 무죄 구형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의 백지 구형은 대부분 너무 오래 전 사건이어서 수사기록 자체가 남아 있지 않을 경우에 해 왔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지금의 검찰이 유ㆍ무죄 판단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법원 판결에 맡긴다는 얘기다. 지난 5월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의원의 1980년대 보안법ㆍ집시법 위반 혐의 사건 재심에서 검찰은 “경찰의 고문으로 받은 김 전 의원의 자백은 유죄 증거로 사용되지 않았고, 당시 재판부는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조서를 제외한 증거만으로 유죄 판결을 했다”며 백지 구형을 했다.
하지만 국가기관인 검찰이 과거사위원회 등의 조사를 통해 조작으로 드러난 사건에 대해서도 ‘수사기록 없음’을 내세워 백지 구형을 남발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임 검사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사실과 법률적용에 관해 의견을 진술’할 의무를 국민에게 부여받았고, 따라서 유ㆍ무죄 의견을 진술할 법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다”며 “백지 구형은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에 예정돼 있는 적법한 의견 진술이나 법령의 정당한 적용 청구라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재경지검의 한 검찰 간부는 “임 검사 사건을 계기로 재심 사건의 구형 기준에 대한 내부 논의를 더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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