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17년간 전세계 위기종 수집...몰래 들여오다 벌금·댕기열 고생도
집 앞마당 800여종 양치류 별천지...아이들 체험학습장으로 공개 계획
아침 공기가 부쩍 차가워진 5일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자리잡은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고사리 전문가 김정근(81) 교수의 집. 겉 보기엔 여느 ‘마당 있는 집’과 다를 바 없었지만, 막상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별천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760㎡ 남짓한 마당에 온갖 고사리와 야생화들이 각자 식생 환경에 따라 평지, 비탈, 음지. 연못가, 벽 등 곳곳에 피어 있었다. 또 집 한 쪽에 마련된 온실에도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양치류들이 빼곡히 자리잡았다. ‘정릉 고사리원’이라 이름 붙인 이곳에 김 교수와 아내 김영란(63)씨는 지난 17년 동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멸종 위기종 고사리를 찾아 수집ㆍ전시했다. 현재 800여종의 고사리와 200여종의 야생화가 이곳에서 자라는데, 한국 자생종이 400여종인 점을 감안하면, 김 교수의 앞마당은 양치류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김 교수 부부는 공들여 조성한 이곳을 체험학습장으로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보건학을 전공한 김 교수가 ‘살아있는 화석’ 고사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서울대 교수직을 은퇴한 1997년부터다. 식물학 박사 이창복 교수를 따라다니며 고산식물 감별안을 키웠는데, 고사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고사리에만 집중했다. 이후 국내 최초의 고사리 전문가가 됐고 한국양치식물연구회 초대회장까지 역임하면서 ‘고사리의 세계’ 등 관련 저서도 3권이나 냈다. “고사리는 꽃이 안 피어요. 화려하지 않죠. 하지만 자세히 오래 들여다 보노라면 잎 마다 차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게 고사리의 매력입니다. ”
영국,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파푸아뉴기니 등 “고사리가 있는 곳이면 안 가 본 곳이 없다”고 했다. 특히 멸종 위기종 남방고사리는 일본 가고시마 지역에서 우연히 발견해 들여왔다. 또 파푸아뉴기니 열대림에서는 댕기열에 감염되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섬에서는 ‘고사리에 홀려’ 길을 잃었다가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스리랑카에서 채집한 고사리를 젖은 수건에 싸서 몰래 들여오다 적발돼 벌금을 낸 적도 있다. 김 교수는 “당시 난 종류는 반입을 엄격히 규제했지만 연구 목적으로 고사리를 반입하는데 대해서는 다소 관대했어요.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반출ㆍ채취가 금지된 품목들도 반출허가증을 끊어주곤 했죠. 지금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이라며 웃었다.
사실 고령의 두 부부가 수백 평이 넘는 고사리원을 관리하기란 상당히 버겁다. 그래서 올해 초 집을 매각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학술적 가치가 큰데다 부부의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정든 곳이기에 생각 끝에 공공기관의 관리하에 일반에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김 교수는 “많은 시민들이 공부하고 휴식할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 잘 개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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