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
김명희 등 지음
역사비평사ㆍ440쪽ㆍ1만8,500원
1980년 5ㆍ18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의 자살률은 1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라는 한국의 자살률 0.002%의 무려 500배에 달한다.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로 참가했던 사람들 중 최후까지 물리적 국가폭력에 맞서 저항했고, 그로 인해 항쟁 이후에도 구금과 고문 등으로 만성화된 외상을 경험한 기층민들”(81쪽)인 ‘5ㆍ18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외상과 인지적 변화를 가장 강렬하게 경험한 바람에 30년 이상 지난 여태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일상의 범주를 초월하는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충격, 정확히는 정신적 외상을 가리킨다. 심리학적 차원의 용어가 정치ㆍ사회적 영역으로 자연스레 편입한 것은 외상 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개념이 사회적 승인을 획득하면서부터다.
전쟁, 잔학행위, 포로 상태, 엄청난 폭력, 강제이주, 심각한 차별과 굴욕을 겪은 사람들이 그 충격으로 겪게 되는 정신적 외상은 21세기 한국을 상당 부분 규정하는 실체다. 열악한 보상금, 단체 내부에서의 주변화, 광주시민들로부터의 지지 축소, 내부적 갈등 등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5ㆍ18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남은 것은 불안정한 노후뿐이다.
이 책은 광주민중항쟁뿐 아니라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상흔을 헤집는다. 경험자들의 증언이 생생한 고문 대목에 이르면 어투가 현재가 된다. “후배들 맞는 소리가 막 들려요. 그러면 너무너무 그게 괴로운 거예요.”(129쪽)
참혹한 상황은 굴복과 저항, 공포의 재현, 존재부정 등으로 구획된다. 그 같은 분석에는 “한국 사회 최초의 포괄적인 고문 생존자 인권 실태 조사 중 심층 면담 결과를 분석한”(117쪽) 글이라는 역사적 무게가 함께 한다.
PTSD는 일상 차원의 폭력을 거론하며 이제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와해된 공교육으로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 역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미혼모, 해외 입양아 등의 문제는 가족 상실이라는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을 낳는 트라우마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위반했다는 편견에 의한 단죄라는 의미도 있다. 미군계 혼혈아에 대한 암묵적 차별에 적반하장식 식민주의 트라우마의 정당화 과정이 결부된 것과 흡사한 이치다.
책은 각 장에 실증적 방법론에 대한 상술을 거르지 않아 신뢰도를 높인다. 갖가지 통계 역시 허투루 넘기기 힘들다. 하나 하나의 수에 함축된 처참한 고통은 모두 우리가 치러냈던, 치르고 있는 것들이다. 파업 기간 중 회사의 회유 협박과 정신 건강(220쪽), 청소년 대상 성매수 범죄자와 청소년 만남의 방법(268쪽) 등의 데이터 역시 우리의 몰골을 비춘다.
책은 말미에서 5ㆍ18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다시 추궁한다. 김보경 성공회대 NGO학 전공자는 반동 이데올로기의 부활과 발호를 우려한다. 그 같은 부인(否認)의 문화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 침묵과 부인의 문화가 사회화한 나머지 사실을 목격한 다수 대중마저 방관하는 탓이라는 지적은 동시대를 겨누고 있다. 김동춘(성공회대), 최현정(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을) 등 5명의 논문을 모아 펴냈다. 부제는 ‘한국전쟁에서 쌍용차까지’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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