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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순수한 녀석들이었기에 더 서글픈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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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순수한 녀석들이었기에 더 서글픈 재회

입력
2014.11.0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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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에 한국판 재출간된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자전 소설

유쾌한 추억 나눈 동창들과 세월 흐른 후 우연한 만남 다뤄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그토록 순수한 녀석들’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담은 특별한 소설이다. 절제된 서술과 간명한 문장으로 그려내는 기억 찾기의 여정이 아득한 슬픔으로 독자를 잠식한다. 문학세계사 제공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그토록 순수한 녀석들’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담은 특별한 소설이다. 절제된 서술과 간명한 문장으로 그려내는 기억 찾기의 여정이 아득한 슬픔으로 독자를 잠식한다. 문학세계사 제공

그토록 순수한 녀석들

파트리크 모디아노 지음ㆍ진형준 옮김

문학세계사ㆍ273쪽ㆍ1만원

삶의 밀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량형을 고안해야만 한다면, 그 단위로는 아마도 ‘추억’이 타당할 것이다. 시간당 추억의 총량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정리에 따르면, 삶이란 결국 추억이라 이름할 수 있는 사건-그것이 좋았든 나빴든-들의 총합이며, 이 총합은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증감이 가능하다. 기억의 채집으로서의 소설이라는 프랑스 문학의 우람한 계보를 이어온 파트리크 모디아노(69)의 소설들은 결국 이 정리의 증명을 의해 씌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모디아노의 1982년작 ‘그토록 순수한 녀석들’은 이 작가의 이례적으로 자전적인 소설이다. 유랑극단의 단역 배우에서 “탐정소설 나부랭이나 쓰는” 작가가 된 주인공 파트리크가 에드몽 클로드라는 이름의 15세 소년으로 살았던 발베르 학교 시절과 추억의 공동 집행자로서의 그 시절 친구들을 후일담의 형식으로 소환해내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라는 거대한 우울의 자장 아래 속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좋기만 했던 발베르 학교 시절은 사춘기의 이 소년들에게 삶의 원형이었다. 그러므로 우연한 만남을 통해 그 시절의 사소한 것들까지 기억해내려는 ‘나’의 행위는, 비록 쓸쓸하고 우수에 가득 차 있을지언정, 삶을 복원하려는 치열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20년 안팎의 세월이 흐른 후, 배우로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우연히 만나는 그 사람들의 그때 이후는 하나같이 고독하거나 불행했지만, ‘우리 시대의 마르셀 프루스트’는 “시간이 멸한 나보다 더 많은 나를” 찾기 위해 이 암울한 조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외로운 생활 끝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됐으나 우연한 검문에 걸려 징집돼 버린 조니, 불안과 초조에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옛 우정을 갈구하는 마약중독자 샤렐, 막장 같던 오랜 인생을 마감하고 애 딸린 여인의 새 남편이 되어 그녀의 할아버지를 청부살해 하려는 뉴망,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뒤흔들었으나 이제는 귀머거리 노인의 가정부 같은 아내가 되어 “내 인생은 슬프게 끝나는 한 편의 소설”이라고 담담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크리스티앙의 엄마 포르티에 부인….

그러나 긴 세월에 걸쳐 벌어진 그 모든 만남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홀로 외롭게 늙어가던 화학교사 라포르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퇴임 후 기거하던 지역에서 공연된 ‘나’의 연극을 보러 찾아와 저녁식사를 청한다. 형편없는 음식을 마주한 그는 고작 단역일 뿐인 ‘나’에게 연극 팸플릿을 내밀며 사인을 요청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 어색한 만남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린 두 딸과 함께 디즈니 영화를 보러 길게 줄지어 선 크리스마스 이브의 극장 입구에서 ‘나’는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치지만 이번에는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북새통인 극장 앞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홀로 두리번거리며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늙은 선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령 같은 걸음걸이로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간결한 문장과 여백이 많은 서술 사이로,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의 무게가 매캐한 연기로 산화하고 만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나’와 친구들은 종종 밤마다 기숙사를 빠져 나왔고, 그 중 두 친구는 “매일 밤 같은 시각에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타자는 계획을 세우곤 했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나’는 불현듯 궁금해진다. “그런데, 도대체 그 기차는 어디로 가는 것이었을까?” 아직 각자의 불행을 할당 받기 전, 어쨌거나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책을 읽고 있던 때. 소설의 마지막, 이미 저마다의 불행에 좌초해버린 후, ‘나’는 마침내 그 기차에 올라 이제는 빈 터로 남은 발베르 학교에 가본다. “나는 발베르 학교가 우리 모두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아무런 무기도 주지 않은 채 우리를 내버린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았다. …우리는 정말 순수한 녀석들이었는데….”

행복이란 어쩌면 불행이 없었던 상태라는 종속적ㆍ사후적 의미 부여만이 가능한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대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1988년 출간됐다 절판된 책을 새롭게 펴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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