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임금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어의(御醫)들은 형식상 처벌 받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선조(宣祖ㆍ재위 1567~1608)가 재위 41년만에 세상을 떠났을 때 상황은 조금 달랐다. 대간(臺諫ㆍ사헌부 사간원)에서 내의원 수의(首醫) 허준을 탄핵했는데 그 강도가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준이 “한기(寒氣)를 높이는 약을 써서 천붕(天崩ㆍ부모나 임금이 죽음)의 슬픔을 불러왔으니 다시 국문해서 율(律)에 의거해서 정죄(定罪)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의료사고를 당했다면 어의는 물론 사형이었다. 광해군은 “허준의 의술이 얇고 부족해서 벌이진 일을 가지고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것은 정률(正律)이 아니다”면서 거부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3월 10일) 그러나 대간에서는 계속 허준을 물고 늘어졌는데 이유가 있었다. 허준의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영흥(永興)부사, 경상도 우수사(右水使)를 지낸 무장이었고, 아버지 허윤(許?)도 용천부사를 지낸 무관이었는데, 허균은 29세 때인 선조 7년(1574) 중인들이 주로 응시하는 의과(醫科)에 급제했다. 허준은 양반 출신이 보는 무과 대신 중인들이 보는 잡과(雜科)에 속한 의과를 선택했으니 소신대로 적성을 따라 간 셈이다. 허균은 임란 때는 피난 가는 선조를 따라가서 선조 37년(1604) 4월에는 호성(扈聖)공신 3등에 책록되고 선조 39년(1606) 정월에는 양평군(陽平君)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까지 오르는 드문 기록을 세웠다. 의과 출신이 정1품 보국(輔國) 품계를 차지하자 사헌부에서 “보국(輔國)이 어떠한 작질(爵秩)인데, 가볍게 비인(匪人ㆍ적격이 아닌 사람)에게 주어 후세의 웃음을 사려 하십니까?… 의관(醫官)이 숭록(崇錄ㆍ종1품)이 된 것도 전고(前古)에 없던 일로서 이것만으로도 외람된데, 보국은 대신과 같은 반열입니다”(선조실록 39년 1월 3일)라고 반대했다. 선조가 위독했을 때부터 대간(臺諫)에서 집요하게 탄핵했던 것은 의과 출신으로 정1품 숭록대부까지 오른 것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 허준이 선조의 죽음에 책임을 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제17대 임금 효종(孝宗ㆍ재위 1649~1659)의 경우는 달랐다. 효종은 재위 10년(1659) 5월 4일 만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급서했다. 두 달 전쯤인 3월 11일 효종은 희정당(熙政堂)에서 이조판서 송시열과 승지와 사관(史官)의 배석 없이 독대했는데, 조선에서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만나는 독대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의 독대 내용은 송시열이 ‘악대설화(幄對說話)’로 남겼는데,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한 이유는 북벌을 재촉하기 위해서였다. 효종은 “나는 이 일(북벌)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다”면서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악대설화’, 송자대전(宋子大全))라고 말하면서 송시열이 북벌에 앞장서겠다면 병조판서까지도 겸하게 하겠다고 회유했다. ‘앞으로 10년’을 말하던 효종이 독대 두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내외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효종의 병은 종기였는데 의관(醫官) 유후성(柳後聖)과 신가귀(申可貴)가 치료를 담당했다. 효종이 침을 맞는 것에 대해 묻자 신가귀는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 고름이 되려고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유후성은 “가볍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세자(현종)가 일단 수라를 든 후에 다시 침을 맞을지 여부를 결정하자고 제안했으나 효종이 당장 침을 맞기로 결정했다. 침을 맞은 직후 침구멍에서 피가 나오자 효종은 “신가귀가 아니었다면 병이 위태로울 뻔 했다”고 칭찬했으나 피가 그치지 않았고, 효종실록은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 군주가 갑자기 급서했으므로 대간에서 사인 조사에 들어갔는데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신가귀는 당일 신병이 있어서 집에서 병조리를 하고 있다가 나와서 침을 놨는데, 그의 병에 수전증(手顫症)도 있었던 것이다. 수전증(手戰症)이라고도 불리는 수전증은 손이 떨리는 증상이었다. 손떨림 증세가 있는 어의가 용안에 침을 댔으니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웠다. 결국 신가귀는 그해 6월 10일 교수형을 당해 어의로서의 인생을 비극으로 마쳤다. 마왕 신해철씨의 시신 부검 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핵심관계자는 위(胃) 수술 과정에서 심낭 천공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해당 병원에서는 장협착 수술만 했지 위 수술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유족들은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도 없이 위 축소수술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간 많은 의료사고가 미궁에 묻혀졌다. 이번 기회에 의료사고를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기구라도 만들어 앞으로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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