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진정한 길은 평화정치… 1969년 서독 총리 된 브란트, 동독 지도부와 대화에 적극 나서
콜 총리, 전면 계승 확대… 대화 정례화로 쌓인 신뢰 바탕, 체제 개혁·경제 지원 연계 압박
대결하면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인권문제는 대화의 전제가 아니라 협상 과정의 최종 결과로 접근해야
11월 9일은 독일인들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1918년 11월 9일 혁명으로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했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23년 11월 9일에는 뮌헨에서 히틀러가 폭동을 일으켰다 실패했다. 1938년 11월 9일 밤에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테러 공격이 폭발해 홀로코스트로의 빗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 어떤 11월 9일 보다 더 장대한 역사적 의미를 품은 것은 25년 전, 즉 1989년의 그 날이었다. 유럽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새로운 탈냉전 유럽통합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통독 논의의 대전제는 “대결정책 폐기”
1961년 8월 13일 동베를린의 동독 공산주의 지배자들은 주민의 대량 탈출을 막을 요량으로 그 흉측한 건축물을 세웠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의 폐쇄성과 억압을 대변하며 줄곧 동독 주민들의 불만과 국제적 규탄의 대상이었다. 1961년 8월 22일 첫 희생자가 발생한 이래 1989년 3월 8일까지 136명이 베를린 장벽에서 숨졌다.
서독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대응은 두 가지였다. 먼저, 장벽 건설 직후 서독과 서방의 정치가들은 동독 공산정권에 대해 비난과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동독과 대화를 거부하고 국제적 공조를 통해 베를린 장벽의 해체와 주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옹호했다. 거친 반공주의 언어를 담은 성명서와 삐라가 난무했다. 1963년 6월 26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도 서베를린을 방문해 반공 연설의 정수를 선보였다.
그러나 서베를린을 방문하기 2주 전에 케네디는 이미 ‘평화의 전략’을 발표해 냉전과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을 드러냈다. 아울러 당시 서베를린시의 시장으로 베를린 장벽에 온 몸으로 맞섰던 빌리 브란트도 케네디 정부와 조율하면서 점차 발상을 전환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 정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하며, ‘현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론과 종교, 학계 및 정치권에서 유사한 평화 구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통일구상의 세부 내용은 백화쟁명이었지만 전제는 한결같았다. 반공주의에 기초한 대결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제안하며 공산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구체적 고통과 물질적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체제의 권력자와 대화하고 협상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1969년 총리가 된 브란트가 보기에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평화 정치야말로 독일통일의 진정한 길이었다. 그는 “거창하게 뭔가를 얘기하기 보다는 작은 일이라도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82년 사민당에 이어 집권한 우파 기민련의 콜 총리가 그 정책을 전면 계승하고 확대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좌파 정치가 브란트와 우파 정치가 콜 총리는 모두 1989년 이전에 ‘대박’은커녕 ‘통일’이라는 말도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악마’와 쉬지 않고 ‘춤추었다’. 춤에 익숙하지 못한 상대가 발을 밟는 경우가 생겨도 손을 들어 따귀를 때리지 않고 발로 계속 리듬과 규칙을 전달했다.
인권문제는 협력 끝에 해결될 것으로 인식
물론, 서독 정치인들에게 공산주의 체제의 인권 문제는 늘 중요했다. 이 때 그들은 한편으로는 동독에서 실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조용한 외교’를 쉬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해결이 ‘오랜 협력 관계의 최종적 결과’임을 잊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보수든 진보든 서독 정치인들은 모두 동독 지배자들과 ‘대결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들과 대화하고 협력해야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인권 문제와 비핵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인권 개선과 비핵화를 남북 간 대화의 ‘전제’가 아니라 협상 과정의 ‘최종 결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확고하지 못하면, 대화는 자주 질퍽대고 성과는 거듭 후퇴해 결국 오해와 불신만 증폭될 뿐이다.
독일의 경우, 공산주의 체제의 변화, 심지어 붕괴는 결코 적대적 반공주의와 공격적 봉쇄 정치의 성과가 아니었다. 동서독간의 다양한 교류와 서독 방문을 통해 동독 주민들은 그 곳의 자유와 번영과 복지에 대규모로 노출되었다. 그들이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점차 동유럽을 거쳐 동독을 떠나기 시작했고, 지배자들이 그 길을 봉쇄했을 때 그들은 동독에 ‘계속 머물기’로 작정하며 결연했다. ‘떠나야’ 할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지배자들임을 그들은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로 표현했다.
서독, 동독지도부에 시종 대화의 문 열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끌었던 동독 반체제 저항 운동에 공산주의 지배자들이 폭력으로 응수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1989년 가을 반체제 대중시위에 직면해 동독 정치 지도부는 군대 투입은 말할 것도 없고 폭력적인 방식의 물리적 제재를 감행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이거나 그저 온 행운이 아니었다. 동독 지배자들은 앞서 경험한 숱한 서독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미 폭력적 의지 관철이나 강제적 압박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고 결국 양보와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던 것이다. 서독과의 오랜 협상 정치를 통해 이미 양보와 조정이라는 자유주의적 정치원리에 ‘고리’ 걸렸음을 보여준다.
서독 정부는 그 이전부터 동독 지도부와 정례 대화를 통해 그들을 계속 유인하며 견제해왔다. 이를테면, 서독의 콜 총리는 동독에서 반체제 시위가 한창이던 1989년 10월 말 동독 정부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동독 지도부가 자유선거와 정당 건설의 자유 보장 같은 정치 체제 전환을 받아들이면 동독에 대규모 경제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며 설득하고 압박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 이미 서독의 콜 정부는 정치 체제의 개혁과 경제 지원을 연계시킴으로 동독을 사실상 ‘공동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독은 분단 체제가 급박한 불안정에 접어들어 동독 체제가 붕괴되는 와중에 그 곳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 체제 전환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신중한 대화 전략을 유지한 것이다. 콜 총리는 1989년 10월 연이은 반체제 시위 속에서 사실상 정치적 정당성과 영향력을 잃은 동독 공산주의 지도부를 여전히 대화와 협상 상대로 인정하며 체제 개혁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심지어 베를린 장벽 붕괴 후에도 서독 정부는 동독이 물리적 충돌이나 사회적 혼란을 겪지 않고 평화적으로 체제 전환하도록 시종 공산주의 지도부와 긴밀히 대화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 후 콜 총리가 섣불리 통일 강령을 내세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동독에서 점차 통일 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던 11월 말에야 비로소 그는 10개조의 통일 강령을 선보였다. 그것도 동독 상황을 고려해 수년 동안의 국가연합 이행기를 전제한 완만한 통일 방식이었다.
통독 끌고 간 ‘화해’‘평화’ 정신 주목해야
그렇기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킨 동독 주민들의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함성에서 그저 ‘반공’ 한 자락을 길어 올려 ‘자유’의 승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선전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현명하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못하다. 공산주의 억압에 대한 규범적 비판을 유지하면서도, 맹목적 반공주의에 빠지지 않고 건설적 협상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많다.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베를린 장벽에 맞서 서독 정치인들이 이끌어 낸 지혜의 소리, 즉 비난과 규탄의 괴성을 덮은 화해와 평화의 저음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평화 정치 실현을 위한 그들의 신중하면서도 현실적인 다양한 노력에 더 눈을 떠야 한다. 25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거대한 함성을 전후해 평화 정치의 질긴 대화 과정이 함께 했음을 웅변하듯 보여준다.
케네디의 서베를린 연설 문구를 따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화와 협상이 단순히 공산주의 지배를 강화할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베를린으로 오라고 하라!” 통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협상 정치 앞에서 그저 미적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베를린으로 오라고 하라!”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ㆍ독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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