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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하찮다고요? 그래서 인간이 사랑스러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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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하찮다고요? 그래서 인간이 사랑스러운 거죠

입력
2014.11.0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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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황정은은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이경은
소설가 황정은은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이경은

죽음과 부활은 한 생애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어미를 향해 의심 없이 활짝 벌린 팔이 무심히 내쳐질 때, 내 몫이라 확신했던 호의를 박탈 당할 때, 세상의 모든 단물과 과즙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 우리는 조금씩 죽어간다. 부활을 망설이게 되는 건 그에 소요되는 에너지가 상당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효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굳이 부활하지 않으면 다시 죽을 일도 없는 것이다. 삶에서 “계속해보겠다”는 말은 그래서 쉽게 나오지 않는다.

소설가 황정은의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는 삶의 예기치 못한 부활에 관한 이야기다. 소라와 나나, 두 자매의 엄마인 애자의 인생은 남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공장 톱니바퀴에 갈린 남편의 시체를 두고 시댁 사람들이 합의금을 배분할 때, 이름처럼 사랑이 전부였던 애자는 며느리나 올케로서 부활하기 보다 애자로서 죽어가는 쪽을 택한다. 세간 일체를 넝마주이에게 넘기고 이사한 반지하 방에서 애자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결국엔 비참하게 죽을 인생,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을 두 딸에게 주문처럼 되풀이한다.

소라는 “죽고 나면 그뿐”이라는 애자의 말이 싫지 않다. 아니, 달콤하다. 재기의 부담감을 깨끗이 불식시키는 안온한 폐허. 나나의 임신이 못마땅한 것도 그래서다. 아기라니, 엄마가 되겠다는 것인가, 애자가 되겠다는 것인가, 또 다른 폐허를 건설하겠다는 건가.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나나는 애자가 밉다. 애자에 동조하는 듯한 소라도 밉다. 엄마와 언니이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으로 살기를 택해버린 그 연약함이 밉다. 애자처럼 삶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나나가 취한 전략은 전심전력을 경계하는 것이다. 목을 매지 않으면 목을 잃을 일도 없을 터다. 모세라는 이름의 남자를 만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면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 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잦은 태몽과 자신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심장박동에 나나는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토록 많은 꿈을 보내오는 아이의 열심, 탄생을 향한 순전한 욕망 앞에서 전심전력에 대한 냉소는 설 자리가 없다.

비명횡사한 사촌의 장례식에서 나나는 주저 앉아 절규하는 백모를 본다.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남편 잡아 먹었다”며 어머니의 등짝을 후려치던 친척들 가운데 백모가 있었다. 오랜 적대감에 사로 잡혀 있던 나나는 먼 옛날 가만히 아기의 심장박동을 느꼈을 백모를 떠올리며, 자신 안에서 그토록 혐오하던 애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내 고통에 매몰돼 타인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그 모습을.

끊임없이 침해 당하는 삶의 고귀함, 그리고 결국에는 발각되고 마는 삶의 무의미함. 작가는 삶이 덧없다는, 그래서 냉소 받아 마땅하다는 수많은 증인들의 외침에 굴하지 않고 그래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이 덧없음, 그 자체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며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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