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경제의 모습은 ‘뚜렷하게 가시화된 악재도 없지만 특별한 호재도 없는 가운데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는 형국’으로 축약될 수 있다. 이를 두고 성장엔진이 꺼져간다거나 지속가능한 성장이 곤란하다고들 하는데, 이런 현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새로운 정상’ 상태로 정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가쟁명식으로 쏟아져 나오는 ‘○○노믹스’라는 이름의 비상경제대책들은 지금과 같은 장기 저성장 상태를 ‘비정상’이라 진단하고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데 여념이 없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창조경제를 실현하는 것이 구호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산업정책 차원에서 자리매김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정책목표를 설정하는 일이다. 창조경제의 목표는 새로운 일자리와 먹거리를 창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목표는 유사한 듯 다르고 달성하는 데 긴 시간을 요할 수 있다. 예컨대 창조경제의 목표가 신성장동력산업과 같은 먹거리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이는 혁신형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신소재ㆍ부품산업이나 새로운 서비스산업에 집중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 위주의 조립ㆍ가공산업이나 대형 장치산업으로 대표되는 구성장동력산업 만큼 대규모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는 작고 투자의 회임기간은 길 수 있다. 따라서 창조경제의 목표를 위와 같이 설정할 경우에는 긴 호흡으로 성과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성과를 측정하는 방식과 지표를 확립하는 일이다. 창조경제가 상정하고 있는 먹거리는 융합과 창의에 바탕을 둔 신수종 산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산업에는 기존의 산업연관분석에서 사용하는 산업분류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워 생산ㆍ고용 유발효과 등과 같은 성과의 측정이 쉽지 않다. 따라서 정부, 한국은행 등 관계당국은 새로운 산업분류를 서둘러 마련하고 표준 무역분류(SKTC, SITC) 등과도 매칭시킬 필요가 있다.
셋째, 공정거래정책, 고용ㆍ교육정책 등 하위 정책목표ㆍ수단과의 정합성을 도모하는 일이다. 창조경제가 상정하는 신수종 산업은 중소기업에 의해 영위될 여지가 큰 만큼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 경쟁제한 등 불공정거래 문제에 노출되기 쉽다. 왜냐하면 태양광, 풍력, 원전플랜트, 이차전지 등과 같은 신수종 산업은 부품에서 완성품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가치사슬을 통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가치사슬의 통합과정에서는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M&A, 업무ㆍ기술제휴 등이 빈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잉취업 상태에 있는 기존의 서비스산업의 경우에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융합된 새로운 형태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으로 고용자를 전직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고용정책이나 교육정책과의 조율도 필요하다.
정통 보수주의 관점에서 창조는 신의 영역이자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진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그리고 생성→발전→소멸에서 다시 생성으로 이어지는 기업생태계는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경제의 진화과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이 계열화를 통한 사세 확장으로 경쟁을 제한하고 경영권을 세습하는 현실에서는 생성과 발전은 있되 소멸과 창조적 파괴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듯 단절된 기업생태계에서는 창의와 혁신에 기초를 두는 창조경제가 뿌리내리기 어렵다.
많은 국민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더 나아가 자본과 노동이 상생하는 가운데 ‘정합의 복지’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상향을 그려왔다. 그리고 창조경제가 양극화, 고용없는 성장, 성장동력 소진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방안인 동시에 이런 이상향을 실현하는 규범적 대안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조경제의 실현은 어렵고도 긴 배려와 인내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든 경제주체가 이런 이상향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 여정이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힘든 여정이야말로 ‘새로운 정상’이 상정하고 있는 ‘정상’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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