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봄은 연두신록이 아니라 노란색 리본 물결로 시작됐다. 세월호 실종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무사 생환을 간절히 염원하는 노란 물결이었다. 그러나 단 한 생명도 구하지 못한 채 그 잔인한 봄이 속절없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었다. 팽목항에, 분향소에, 거리 가로수와 가로수를 연결한 줄에 수 많은 손길들이 매단 노란 리본들은 해지고 바랬다. 이젠 노란 단풍이다. 아파트 단지와 도심 소공원, 거리에 샛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이 가슴 시리게 눈에 들어온다.
▦ 노란 빛깔 단풍은 은행나무가 대표적이고, 아까시 회화나무 등 콩과 식물과 포플러종류, 느릅나무 종류가 대개 노랗게 물든다. 그 중에서 올 가을 특별히 눈길이 가는 것은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팽나무 노란 단풍이다. 지난 봄부터 우리가 숱하게 들었던 가슴 아픈 단어 팽목항. 팽나무가 많아서 팽목리이고, 이 마을의 항구가 팽목항이다. 남해안과 도서지방에 자생하는 팽나무는 뿌리가 굳건해 태풍과 같은 강풍에 잘 버틴다. 그래서 해안가 마을에서는 거센 바닷바람을 막은 방풍림으로 많이 조성했다.
▦ 수형이 우람한 데다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선조들은 느티나무와 함께 당산목이나 정자목으로 많이 심었다. 경남 고성군 마암면 삼락리 당산나무는 금목신(金木神)이란 이름의 팽나무인데 논 400평을 소유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여기서 나는 소출로 당산제를 지낸다. 추위에 약한 팽나무가 서울 등 중부지방에서 조경수로 식재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남쪽 지방에서만 살던 나무들의 월동 북한계선이 높아지면서부터다. 나무 이식기술의 향상도 한 몫 했다.
▦ 팽나무가 조경수로 인기를 끌면서 무분별한 반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요즘 서울 지역에서 보는 팽나무들은 거의 모두 남해안과 제주도 등 도서지역에서 수령 수십 내지 수백 년 생을 옮겨온 것들이다. 정든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옮겨지기까지에는 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지 모르지만 서울의 팽나무들은 올 가을 한층 선명한 노란 빛깔로 물드는 것 같다. 세월호 비극을 현장에서 묵묵히 지켜본 팽목항의 팽나무들도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노란 리본보다 더 노랗게 물들지 않았을까. 어느 새 희미해져 가는 세상 사람들의 기억을 일깨우기라도 하듯이….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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