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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망 하나가 거기 있음을, 한 해가 저물 즈음 선포하는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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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망 하나가 거기 있음을, 한 해가 저물 즈음 선포하는 축제

입력
2014.11.0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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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문인들의 열정 이용하는 잡지들 등단장사 폐단도 많지만

문학의 사회적 공공성 확인하는 신춘문예는 여전히 특별해

전국의 문학 지망생들이 가슴을 설레고 있을, 또는 조이고 있을 계절이 왔다. 여러 일간지의 신춘문예의 작품공모 마감일이 대개 12월 초순이니 이제 남은 기간이 한 달 남짓이다. 오랫동안 구상하고 집필해온 작품에 마지막 손질을 하는 사람들, 이미 완성된 여러 작품 가운데 한두 편을 고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나, 이제야 겨우 집필을 시작하여 벼르고 벼르던 생각을 마침내 작품으로 옮겨 놓으려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 같다. 문단에 등단하는 길이 다양해졌고, 그래서 일각에서는 신춘문예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에 더해 그 폐단을 말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는 문학에 뜻을 둔 예비문인들에게 가장 확실한 진입로이며, 새롭고도 어두운 언어창조의 길을 탐색해온 순결한 정신들이 자신의 입지를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문학계 전반의 관점에서는, 검증 받은 후속부대를 일거에 확보할 수 있을뿐더러, 문단 등단제도 아래 감추어진 여러 층위의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정기적으로 마련해 준다는 점도 그 부수적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작동되고 있는 등단 제도의 폐단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제도의 문제이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건 제도와 얽혀 있다는 것은 문학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해 전에는 한 시인이 문단 등단에 얽힌 비리를 폭로하는 글을 자신이 주관하는 시 잡지에 발표하여 문학계에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내용이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었다. 문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삶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고달픈 것이지만 시나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의 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 처지에서, 실질적으로 문학계를 형성하는 잡지들의 지면이 이 열정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처음부터 ‘등단장사’를 목표로 발간되는 잡지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간혹 뜻은 크나 운영이 어려운 잡지들도 이 넘치는 열정들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들 잡지가 노리는 것은 물론 허영에 부풀어 있는 아마추어 문인들이며,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명칭을 사교적 장식으로 이용하려는 한량들이다. 허나 그 중에는 문학에 적잖은 수련을 쌓고 나름대로 중요한 작업을 해왔으나, 그 시도가 너무 독특해서, 나이가 너무 많아서, 내세울 학력이 없어서, 때로는 조심성이 지나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문학 지망생들도 없지 않다. 나로서는 등단과 비등단을 칼 같이 가르는 우리의 문학 풍토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학에 크게 뜻을 둔 사람이라면 그가 어느 단계에 있건 시인이나 소설가로 자처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가 그를 그 이름으로 불러주어 나쁠 것이 없다. 그가 그런 이름을 얻고 나서도 문학하는 사람들과 뜻있는 독자들에게 확고한 인정을 받기까지는 극히 험난한 길이 아직 남아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서울과 지방에서, 너무 숫자가 많다 싶을 정도로 여러 문학잡지들이 그 나름의 목표를 내걸고 창간되었으며, 규모는 작아도 내용이 알찬 동인지들이 간혹 눈에 띄고, 인터넷 문학 사이트에도 이름 없는 신인들의 좋은 작품이 가끔 올라온다. 이런 매체들도 신인선발기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함으로써 그 효과가 예비문인들의 갈증을 해소시킬 뿐만 아니라, 등단의 길이 턱없이 넓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등단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 한은 ‘등단 꼬리표 팔기’의 폐단이 사라지지 않는다.

신인을 선발할 때 심사를 하는 사람과 심사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심사하는 사람이 좋은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그에게도 행운이나, 행운은 드물기에 행운이다. 심사위원들은 높이 쌓인 원고뭉치를 검토하면서 당선작이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까 봐 늘 걱정한다. 그러나 투고자들은 심사위원들의 고식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했다고 자주 한탄한다. 독창적인 시도에 열정과 노력이 동반한 작품은 누구의 눈에라도 띄게 마련이지만, 오해 속에 시들어버린 재능이 세상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재능을 미리 발견하고 여기저기서 돋아나는 싹들의 힘을 찾아내어 올곧게 키워내기 위해서는 그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하고, 그 위에 끔찍하리만큼 많은 정성과 시간을 바쳐야 한다. 문단이나 시단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모호하나, 그것이 문학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열정을 암시하는 것은 확실하다. 글쓰기는 개인들의 독창적인 작업이지만, 문학을 사회적 필수 기능으로 만드는 것은 이 공동체적 열정이다.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한 열정의 소외는 곧바로 문학 전체의 소외로 이어진다.

신춘문예의 진정한 순기능도 아마 거기 있을 것이다. 몇몇 중요한 일간지들이 신춘문예 제도를 만들었을 때는 이 제도로 등단한 작가들에게 발표의 기회도 제공했다. 이제는 문예활동 전반이 문학잡지를 중심으로 펼쳐지기에 일간지들이 시 소설 등의 창작품을 게재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신춘문예 제도를 없애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춘문예는 한 매체를 위해 복무하는 작가들을 뽑는 일이 아니라, 문학이 사회적 공공성을 지닌 활동임을 늘 새롭게 확인하는 축제가 되었다. 한 인간이 작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순결한 빛의 세계와 이 거친 현실을 연결하려는 특별한 열정에 대한 자각과 같다. 신춘문예는 이 열정의 자각을 기리고, 이 세상의 희망 하나가 거기 있음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돋아 오를 때마다 선포한다.

지금 이 시간에 가슴을 설레고 있을, 또는 조이고 있을 순결한 정신들을 위해 정화진 시인의 시 두 편을 다시 읽는다. 정화진 시인은 1986년에 등단하여, ‘장미는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와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등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 후 사반세기가 다 되도록 활동을 중단하고 있지만, 저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시집에서 한 편씩 인용한다. 첫 시는 ‘박우물’이다.

둥글게 내 볼을 파갔어, 박바가지였어

그래도 있잖아, 새색시였어

이쁘게 들여다보는 새벽이었어

떨려 온몸이 파들거렸지 뭐

하늘이 몇 번 우그러지고 펴지고 그랬어

제목으로 쓴 ‘박우물’은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얕고 작은 우물이다. 그 우물에 밤새 고인 물을 어느 새색시가 바가지로 퍼냈다. 물의 얼굴이 잠시 움푹 파이면서 일렁거렸다. 물의 온몸이 떨리면서 그렇게 파들거렸다. 우물의 물과 새색시의 바가지가 만나는 그 순간을 시인은 성적 흥분상태로 표현한다. 글 쓰는 사람들이 흔히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글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면이 요동하며 거기 비친 하늘이 우그러졌다 펴지듯, 작가가 어떤 진실을 만나 그것을 글로 옮길 때도 뜨거운 전율 하나가 그의 존재를 관통할 것이다. 글쓰기의 축복이 이와 같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에게, 그가 글로 써야 할 생각과 그 글의 관계가 늘 이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새벽마다 우물에 고이는 물처럼, 그가 써야 할 것들이 늘 그의 발끝에 고여 그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길도 없는 황무한 땅을 헤매야 하고, 진흙탕 속에까지 내려가 거기 가라앉아 있는 어떤 정수를 길러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주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무엇을 썼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는 끝내 비밀을 지키려는 것들의 입을 강제로 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읽게 되는 또 한 편의 시는 두 번째 시집의 제목과 같은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이다.

토막난 길들을 이으며 강은

탐욕스레 삶의 안팎으로 흘러간다

때로 사람들이 정처없이 발을 빠뜨리고 마는

저 강의 하구에

물컹거리는 무덤들의 바다가 있다

무수한 분묘이장공고를 나부끼며

그 무수한 분묘이장공고를 펄럭이며

고요한 바다가

동백을 품은 채 누워 있다

낡은 옷의 사람들이 절름거리며

그들 몫의 생애를 건너가고 있을 때

삶의 안팎으로 흘러가는 강물은 아마도 우리의 욕망,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욕망일 것이다. 욕망이 잇지 못하는 길은 없다. 강의 하구는 그 욕망의 무덤들이다. 파도를 타고 한 번 출렁인 욕망은 다른 파도에 그 욕망을 넘겨준다. 파도가 그렇게 출렁이고 “분묘이장공고”가 그렇게 펄럭인다. 그러나 그 욕망의 파도 아래에는 시들지도 않고 떨어진 “동백”도, 그 순결한 욕망도 함께 가라앉아 있다. 이제 작가가 되려고 제 펜의 날을 가는 사람도 제 욕망과 세상의 욕망이 출렁이는 강을 건너가려고 특별한 다짐을 할 것이다. 그의 탐색이 어디에 이를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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