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조선출판경찰월보(朝鮮出版警察月報)라는 월간지가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했는데, 한 달 동안 언론이나 출판 계통의 상황을 다룬 잡지이다. 1936년(소화(昭和) 12년) 8월호에 ‘불허가 언문(諺文) 출판물 목록’이란 항목이 있다. 두 권이 출판금지 되었는데 이교각(李敎珏)이 발행한 정선 음양대조 만세약력(精選陽陰對照 萬歲略曆)과 민영주(閔泳?)가 발행한 병정충의열전(丙丁忠義列傳)이었다. 불허가 ‘언문’ 출판물이라지만 두 권은 모두 한문(漢文) 저서다. 발행 금지 사유는 모두 ‘치안방해’라는데, 병정충의열전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후금(청)에 맞서 싸운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청나라에 맞서 싸운 조선 인물들 이야기가 왜 금서목록에 올랐을까? 이 책의 원 저자는 인조(仁祖) 때의 민경남(閔耕南)인데, 조선총독부는 “다수의 불온문자가 있고 숭명(崇明)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금지”시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1936년 8월 호의 ‘국문(國文) 주요 단행본 납본조(納本調)’에는 이 달 검열을 통과한 책들이 다수 올라 있는데, 일본이 중일전쟁 등 확전으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 집의 방공(防空), 국방군사(國防軍事)에 관한 명치천황(明治天皇) 어제(御製) 따위 책들인데, 이 무렵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어 수업을 축소하려는 방침이라고 보도한 신문기사들도 모두 보도 금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얼마 전 교학사 국사교과서는 일제가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 국어교육을 강화한 것을 두고 “한국어를 필수화했다”고 적어 식자들의 조롱거리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국어는 물론 일본어이다. 마찬가지로 조선경찰출판월보에서 말하는 국문(國文)은 당연히 일문(日文)이다. 이 달에 발간된 책 중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농촌, 산촌, 어촌의 후방의 임무(農山漁村ノ銃後ノツトメ)란 책도 있었다. 일제의 대륙침략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식민지 한국의 농촌, 산촌, 어촌 같은 후방에서는 어떤 자세를 갖고 전선(戰線)을 도와야 하는지를 설파한 책이다. 또 하나 하라구찌 토라오(原口虎雄)라는 인물이 쓴 일장기(日章旗)와 기미가요 이야기(日ノ丸ト君ガ代ノオハナシ)라는 책도 있었다. ‘기미가요(君が代)’는 ‘임금이 통치하는 시대’라는 뜻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國歌)였다. 기미가요 가사는 905년에 발간된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ㆍ고킨와카슈)에 처음 엿보이는데, 이때는 ‘기미가요’가 아니라 ‘우리 님은(わが君は)’이었고, 11세기 초에 편찬된 화한랑영집(和漢朗詠集)에도 ‘님의 시대(君が代)’로서 그 형태가 조금 달랐다. 19세기말까지 일본은 당연히 국가(國歌)가 없었다. 그러다가 1869년 나카무라 스케쯔네(中村祐庸)가 요코하마에서 영국의 군악대장(軍樂隊長) 존 펜턴에게 서양 음악을 배우면서 영국에는 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1876년 해군 군무국장에게 서양에서는 국가의식 때 국가를 연주한다면서 일본도 이를 따라 할 필요가 있다고 상신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 후 궁내성 아악과 직원인 히로모리 하야시(林廣守)가 독일 출신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와 함께 만든 곡이 1880년 11월 3일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 때 처음 불러지면서 국가가 되어갔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임금의 치세는 천대 팔천대 계속되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다시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내용의 기미가요를 각급 학교의 조회시간은 물론 각종 집회나 음악회 등 모든 집회 때 반드시 부르게 했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때면 각지에서 축하회를 하면서 법석 떨었는데 행사의 꽃은 ‘기미가요 합창’이었다. 일제는 1932년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한 후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인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이때 김구가 지휘하는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인데,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4월 29일자 호외(號外)는 상해 발 전통 지급으로 “오늘 오전 11시 반 천장절 축하식에서 기미가요 합창 중 갑자기 식장 단상의 시게미쓰(重光) 공사, 시라카와(白川) 사령관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자가 있었다… 식장은 혼란에 빠졌다”라고 보도했다. 일인들이 상해 점령에 감격해서 “일왕의 시대는 영원하리라”는 ‘기미가요’를 합창할 때 수류탄이 투척되어 아수라장이 된 것이니 더욱 뼈아팠던 것이다. 최근 한 방송이 부주의로 기미가요를 틀었다고 제작진이 사과하고 담당 PD가 사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1945년 폐지되었던 기미가요를 다시 국가로 지정했던 1999년에 정부에서 중국 등 일제 침략을 당했던 국가들과 연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수로 기미가요를 튼 방송은 사과라도 하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옳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고위 공직에 있는 대한민국의 부조화한 현실은 누가 사과해야 하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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