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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멘, MBC

입력
2014.11.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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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이용은 ‘잊혀진 계절’로 ‘비련’의 조용필을 제치고 가수왕을 차지했다. 김유동의 만루홈런으로 끝난 한국시리즈가 없었다면 1982년은 내 유년의 가장 어두운 해가 될 뻔했다. 여의도에 있는 교회를 가려면 주일마다 고수부지를 가득 메운 군인 막사를 지나쳐야 하던 때였지만, 연말만 되면 누구나 한 번쯤 올해의 가수왕을 점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MBC는 특별한 방송사였다.

최근 송창식을 검색하다가 그가 출연한 10대 가수 가요제 동영상을 보게 됐다. 거기엔 재색의 완벽한 정점에 있던 혜은이가 있었고, 마흔이 안 된 이미자와 서른살의 최헌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10대 가수들의 면면을 보다가 나는 날짜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12월 31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두 달 전 대통령 시해 장소에 있었다고 알려진 심수봉이 ‘그때그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올해의 신인가수로 정태춘이 선정됐으며, 송창식과 양희은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를 불렀다. 다가올 것은 훨씬 엄혹한 시절이었으나 MBC는 봄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젊은 손석희가 포승줄에 묶인 채 웃고 있는 사진이 대학가에 나붙은 것은 1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하지만 당시 젊은 MBC 사람들의 노력이 실제 방송 내용에 반영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지나야 했다. 2005년 ‘PD 수첩’의 황우석 논문 조작 보도는 MBC가 오랜 여정 끝에 다다른 빛나는 정점이었다. 사실을 확인했다고 판단한 MBC 시사교양국 PD들은 황우석에 우호적이었던 여야 불문의 정치권력 전체와, 그를 국가대표 과학자로 영웅시하던 대다수의 시청자들에 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4개 광고주가 계약을 철회하는 와중에서도 MBC는 사실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한국의 과학계가 더 큰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냈다.

2012년 통합진보당 선거부정 의혹 사건이 있었다. 부정 자체보다 이것이 내부에서 논의되는 과정 자체가 훨씬 더 큰 문제였던 사건이었다. 당시 MBC에서 해직 상태였던 이근행은 ‘뉴스타파’를 통해 통진당의 이정희를 인터뷰한다. 예의 정연한 논리로 조목조목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변호하던 이정희에게 이근행이 물었다. “이정희 대표가 필리버스터입니까?” 진보진영 전체에 재앙을 가져온 당시 통합진당 전국운영위원회에서 이정희가 보인 태도를 문제삼는 질문이었고, 이는 지금껏 방송에서 그녀가 보인 가장 긴 침묵으로 이어졌다. MBC 언론인에 대한 신뢰가 한층 더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중립적이지 않다. 좌와 우의 가운데가 중립이라면 사실 중립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좌와 우 중 어느 하나가 한 쪽으로 더 치우친다면 항상 가운데 있어야 할 중립 또한 같은 방향으로 치우칠 것 아닌가. 그래서 언론이든 과학이든 지향해야 할 것은 중립이 아니라 사실이다. 사실의 가치는 취재와 연구 과정의 객관성과 결과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지, 이것이 초래할 정치적 결과에 따라 매겨져서는 안된다. 좌와 우가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중립을 요구하는 것만큼 반지성적인 일도 없다. 황우석과 이정희에게 사실의 무게를 냉정하게 들이대던 한학수와 이근행이 빛나는 이유다.

지난 몇 년간 MBC는 수 차례 조직개편을 했다. 2년 전 전임 사장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MBC가 승리”하기 위해 “시청자의 신뢰 되찾고 정치적 중립 위해 시스템 점검”을 한 끝에 시사교양국에서 PD수첩을 분리해 교양제작국으로 축소했다. 지난 주 현 사장은 “회사 성장동력과 역량을 강화”하고 “미디어 융복합 시대에 맞게 직종ㆍ부문 간 융복합 역량을 키운다는 원칙도 고려하여” 교양제작국을 해체하고 타 직종으로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여기엔 한학수와 이근행도 포함됐다.

지금껏 조직을 연구하고 있지만 이같은 조직 개편이 언론 본연의 가치에 어떻게 부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신 후진국 정치가 공공조직의 내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예들은 지금도 세계은행 홈페이지에서 얼마든지 찾아 올 수 있다. 기독교의 아멘에는 ‘진실의 증인’이라는 뜻이 있다. 아멘은 진실과 거짓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를 가차없이 뱉어 버린다고 했다. MBC에 아멘이 살아 계시길 기도한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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