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아름다운 가을, 내가 속한 인문학 공동체에서는 작은 행사가 열렸다. 각 공부 모임들이 약간의 음식을 준비해 나누며 서로 교류하는 일종의 확대 뒤풀이였다. 그림을 배운 이들은 그림을 전시하고, 시를 공부해 온 이들은 시를 낭송했다. 외국어를 공부한 이들은 해당 외국어로 노래를 불렀고, 자신이 공부한 책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 읽어주는 이도 있었다.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많이 웃으며 행사는 밤까지 진행됐다.
짧지만 이 모임에도 역사가 있다. 재작년 6월, 여름을 코앞에 두고 8개나 되는 공부방의 에어컨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데, 참여자들이 에어컨 마련을 위한 장터를 연 것이다. 에어컨은 행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두 마련됐다. 소문을 들은 이들이 다투어 집에서 쓰지 않는 에어컨을 들고 오거나 새 에어컨을 구입해 기증한 것이다. 장터는 작은 잔치로 바뀌었다. 이 행사로 만들어진 돈은 에어컨 설치비와 매달 빡빡하기만 했던 공동체 운영비로 쓰였던가. 한번 열린 장터는 지난해에도 열렸다. 스피커, 큰 방의 암막 커튼, 빔 프로젝트 등이 이 때 마련됐다. 올 봄 세월호 참사로 열리지 못한 행사를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행사가 수평적 소통, 나눔과 우정, 참여와 연대 같은 공동체의 가치를 확인하는 마당이기도 했던 것이다.
대학 바깥의 인문학 공동체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은 다양하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도 다르다. 이렇게 모두가 제각각이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다. 같은 공부를 하는 도반(道伴)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이해 관계가 맞서지 않는다. 경쟁하기보다 서로 위하고 나누고 사랑한다. 쉽지 않은 길 함께 걸으며, 나도 옆에서 걷고 있노라 발자국 소리를 내준다. 이런 곳에서 어울리다 보니 우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직장생활 10년, 20년 하던 이들이 직장에서 찾지 못한 지음(知音)을 만났다고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겨난다.
이곳에서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 한 분야에서는 가르치는 입장에 서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배우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함께 하는 이를 계몽시켜야 할 학생이거나 개종시켜야 할 이교도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료로 생각하는 것이다. 강사가 강의를 하고 수강자는 듣기만 하는 일반적인 강좌 못지않게 구성원 모두가 배우고 가르치는 수평적인 공부 모임이 많이 생겨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눔이다. 이는 누군가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이에게 넘치는 것을 흘려 보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식이든, 먹을 거리든, 또 다른 무엇이든 형편대로 나누는 것이다. 어떤 이는 휴일 공동체의 작업장에 나와 망치질, 페인트질 하기를 나누고, 어떤 이는 청소와 설거지를 나눈다.
누군가는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도 하지만 공부만큼 힘들고 끔찍한 것이 또 있을까. 공부가 특히 끔찍해지는 것은 이것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될 때다. 부와 신분상승, 그리고 권력의 분유를 위한 수단으로 타락할 때다. 여기서 국가와 자본은 돈을 무기로 학자들을 통제하고 지성은 권력과 자본의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공부하는 이가 목적을 바꾸는 순간, 자유가 찾아온다. 삶과 공부를 갈라놓은 담이 헐리고, 연구자에게는 탐구해야 할 주제들이 넘쳐난다. 학문과 시민의 일상 의식, 또는 삶을 연결하는 공부, 시대를 읽고 통찰하는 공부, 자신의 본성과 사유 역량을 증가시키는 공부, 삶의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아닌, 삶 자체로서의 공부.
여기서 횡단, 또는 가로지르기는 당연하다. 들뢰즈 강독에 참여하는 이가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헤겔을 강독하는 이가 노장을 읽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강독하고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을 공부하는 이들이 불교와 기독교, 유교 경전 강독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문학 공동체에서의 공부라고 해서 마냥 쉬울 리 없다. 그러나 끔찍하기보다 즐겁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이들이 갈수록 매주 공동체를 찾아 공부한다. 이런 공부를 하다 보니 참여도 자연스럽다. 이들의 꿈은, 더불어 함께하는, 다른 세상이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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