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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마취

입력
2014.11.0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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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기형도는 29년을 살았다.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황지우나 이성복 등과 함께 90년대 시인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예술가의 요절은 흔히 당사자의 삶과 예술을 신비로운 아우라로 감싼다. 기형도의 요절도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입 속의 검은 잎’에서 기형도라는 이름을 지우더라도 이 시집은 스스로 한국 현대시사에서 자기 방을 요구할 만하다”고 소설가 겸 에세이스트 고종석은 평가했다. 기형도는 세상과 불화했다. 외롭고 무서운데도 좁고 어두운 방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은 이유다. 대신 그는 썼다. 고통을 사랑했고 드러냈다. 병세는 80년대보다 더 깊어졌지만 아픈 이는 외려 준 것 같다. 희망 마취 덕이다. 사진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제공
시인 기형도는 29년을 살았다.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하지만 황지우나 이성복 등과 함께 90년대 시인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예술가의 요절은 흔히 당사자의 삶과 예술을 신비로운 아우라로 감싼다. 기형도의 요절도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입 속의 검은 잎’에서 기형도라는 이름을 지우더라도 이 시집은 스스로 한국 현대시사에서 자기 방을 요구할 만하다”고 소설가 겸 에세이스트 고종석은 평가했다. 기형도는 세상과 불화했다. 외롭고 무서운데도 좁고 어두운 방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은 이유다. 대신 그는 썼다. 고통을 사랑했고 드러냈다. 병세는 80년대보다 더 깊어졌지만 아픈 이는 외려 준 것 같다. 희망 마취 덕이다. 사진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제공

내 몸으로 병은 신음했고 내 맘은 굿판이었다. 이성복의 대학 초년 회고다. 세상이 아프면 시인이 앓는다. 희망은 마취제다. 각성을 막는다. 싸워야 고통을 안다. 기형도는 기자였다.

“내게 ‘희망’의 이미지는 상술, 무임승차, 불신이 느껴지는 위로, 네온사인 십자가 등이다. 문자 자체로도 희망(希望)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기형도는 간단히 썼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있단 말인가…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19~21쪽) (…) 그는 희망을 부숴야 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여행기는 “희망에 지칠 때까지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였다. (…) 오히려 표현 그대로 생각하면 절망(切望)이 희망적이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 희망은 뭔가 바라는 상태. 무엇이 더 ‘희망적’인가? (…) 소망, 원망(願望), 희망은 종교다. (…) 대중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바쁜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종교인이다. 요즘은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도 힐링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말하는데 이건 진짜 절망적인 현상이다. 그들의 임무는 고통을 드러내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할 사람들이 대중이 원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불길한 징조다. (…) 기형도가 살았던 1980년대에 비해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하늘을 두 쪽 낼 만큼 강렬하다. 실현 가능성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을 만큼 노력하거나 노력해봤자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대의 희망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대중은 ‘착해 보이는 말’, 희망으로 대응한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의 볼모가 된다. 희망은 욕망의 포로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종하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희망은 욕망에 대한 그리움(한겨레 ‘정희진의 어떤 메모’ㆍ여성학 강사) ☞ 전문 보기

“얼마 전 타계한 고 성유보 선생은 ‘천생 기자’였다.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74년 동료 기자들과 함께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유신독재의 폭압에 맞서 싸우다 이듬해 봄 거리로 내쫓겼다. (…) 90년대 초 신문사에 입사한 내게 ‘해직 기자’는 고인처럼 태산 같은 어른들에게나 붙는 이름이었다. (…) 언론과 언론인의 잿빛 미래를 한탄하면서도 스스로 사표를 던질지언정 노트북과 마이크를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나뿐일까.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대선캠프와 그 주변을 떠돌던 ‘MB맨’들이 줄줄이 낙하산을 타고 공영방송을 장악하면서 그런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 요즘 두 방송사의 현실을 보면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고 공정방송 회복을 주장했을 뿐인 이들을 기어이 쫓아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한때 ‘한국의 CNN’를 표방했던 YTN은 ‘증오ㆍ황색 저널리즘’에 빠진 일부 종편들과 경쟁하기 바쁘다. MBC는 베테랑 기자와 PD들을 한직으로 내몰고 경력기자 등 외부 수혈로 조직의 DNA 자체를 바꾸는 데 여념이 없다. (…) 반면 해직자들은 1세대 해직 언론인들이 그랬듯이 ‘언론 현장’을 지키며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 기자(언론인)는 투사가 아니다. 그러나 싸워야 기자다. 회사에서 월급 받고 사는 샐러리맨이되 공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야 하는 기자의 숙명이다. 싸움의 대상은 권력일 수도, 자본일 수도, 사익(社益)만 앞세우는 경영진일 수도, 진실을 가리는 거짓된 세상일 수도 있다. 나아가 안주의 유혹에 휘둘리는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그들,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그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희망을 말할 수 있다.”

-해직 언론인이 돌아와야 하는 이유(한국일보 ‘메아리’ㆍ이희정 논설위원)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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