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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계가 사랑하는 문제적 이론가, 발터 벤야민 제대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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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계가 사랑하는 문제적 이론가, 발터 벤야민 제대로 보기

입력
2014.10.3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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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 미학, 정치이론...

그의 사상은 많이 소개됐지만 한국적 시각으로 해석 작업 없어

벤야민은 전략적 언어 사용 대신 개인의 내면과 진실에 집중

벤야민은 평생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쉼 없이 읽고 썼다. 그는 순간순간 떠오른 착상들을 차표 뒷장과 엽서 뒷면에 빼곡히 적었다. 작은 사진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메모. 한길사 제공
벤야민은 평생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쉼 없이 읽고 썼다. 그는 순간순간 떠오른 착상들을 차표 뒷장과 엽서 뒷면에 빼곡히 적었다. 작은 사진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메모. 한길사 제공

국내 학계에서 발터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만만치 않다. 2012년 교수신문에 따르면 2008~2011년 국문학계가 가장 많이 인용한 외국 이론가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러나 저울 반대편에 국내 저자가 쓴 벤야민 연구서를 올리면 눈금은 형편 없이 휘청댄다. 시중에 나와 있는 벤야민 연구서 수십 권 중 번역서를 빼면 남는 것은 대여섯 권뿐. 이 간극은 무엇 때문일까.

독일 출신 유대인인 벤야민은 마흔 여덟의 나이에 자살하기 직전까지 늘 나치의 위협과 가난에 쫓겼다. 노트 살 돈이 없어 편지지, 엽서 뒷면, 차표 뒷장에 빼곡하게 쓴 그의 글은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독일의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그것을 정리해 책으로 펴낸 게 벤야민이 죽고 32년이나 지난 1972년이다. 그의 글을 체계화해 묶는 작업이 더딘 데는 벤야민 글의 특징도 한 몫 한다. 극도로 난해한 문체와 어마어마한 논리의 비약, 역사 문화 예술 신학 매체 법 등 다방면에 뻗어 있는 그의 관심사는, 전문 연구가들조차 그 논리의 틈을 메우는 데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벤야민의 주요 저서들이 번역돼 나온 한국에서 그에 대한 ‘주체적’ 연구 결과가 드문 것은 당연한 일이다. 6월에 출간된 최성만 이화여대 독문과 교수의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길)은 단순 독해에서 벗어나 한국 연구자가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벤야민을 재구성한 드문 책이다. 그리고 최근 문광훈 충북대 독문학과 교수가 ‘가면들의 병기창-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한길사?1,104쪽?3만5,000원)을 출간했다.

문 교수는 이 책에서 벤야민을 소개하고 이해하는 데서 한 발 더 나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벤야민이 어떻게 소용되는가를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저자는 벤야민의 생전에 출간된 네 권의 저서를 비롯해 500편이 넘는 논문과 논설, 서평, 소책자, 정치적 선전문구, 플래카드, 포스터 등을 모두 찾아 읽은 뒤 현재에 맞춰 재구성했다. 6년의 산고를 거쳐 나온 이 책은 올해를 ‘벤야민의 한국적 수용’이 물꼬를 튼 첫 해로 기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_어떤 계기로 ‘지금, 여기에’ 벤야민을 불러내려고 시도했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상가 중 벤야민 만큼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는 문학과 비평, 매체학, 미학, 철학, 정치이론, 도시분석, 자본주의 비판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새 지평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은 국내 연구자들의 공헌으로 그의 사상이 소개됐지만 아쉬운 건 한국에서, 한국어로 쓰인, 한국의 학문적 문화 유산으로 남은 벤야민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모든 훌륭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다면체와 같은 사람이다. 국내 연구자가 그 다면체 중 핵심 부분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고유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작업이 지금 필요하다. 자크 데리다가 해석한 벤야민의 법 개념은 훌륭한 모범 사례다.”

_한국의 벤야민 수용이 왜곡되거나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저술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 같다.

“그렇다. 국내에서 벤야민은 주로 정치적으로 해석돼 왔다. 벤야민은 마르크스를 연구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아웃사이더였다. 정치적 틀 안에 벤야민을 집어 넣는 방식으로는 그의 다채로운 면모를 성실하게 풀어냈다고 할 수 없다. 15장에서는 벤야민이 어떻게 행복을 이해하는가를 다뤘는데, 이런 것도 정치의식만큼 중요하다. 벤야민을 왜곡하고 축소하는 것은 그의 고향인 독일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독일에서 나온 벤야민 연구자 100명 중 90명에 동의할 수 없다. 책을 쓰면서 고수한 원칙 중 2차 문헌(해설서)에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있었다. 서구의 사정에 맞게 해석한 벤야민이 아닌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벤야민의 면모를 취사선택하기 위한 것이다.”

_21세기 한국사회에 벤야민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지식이든, 감수성이든, 삶의 태도든.

“지금 한국 사회는 나쁜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의 과부하 상태다. 많은 이들이 사회 정의를 외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여러 이해 관계에 의해 이데올로기화 돼있다. 즉, 진실을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을 말하니 따라오라’ 고 요구하며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 뿌리에는 언어의 오용이 있다. 언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개인의 내면을 성실하게 좇는 데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윤리고 사회적 기여일 수 있다. 벤야민은 대립하는 사회에서 양자택일을 하는 게 아니라 개체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는 데 집중했다. 거기에 사용한 언어는 풍요롭고 섬세하고 내밀했다. 지금 벤야민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한국 사회 전반을 흔든 대형 사건들이 있다. 여기에도 벤야민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는 늘 모든 당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가치체계를 흔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게 정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증오와 폭력은 현저히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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