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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제왕의 가을

입력
2014.10.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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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무제(武帝) 유철(劉徹ㆍ서기전 157~서기전 87)은 현재의 산서성 중부인 하동군(河東郡) 분양현(汾陽縣)에 행차해 토지신인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내고 분하(汾河)에서 배를 탔다. 이층 누각이 달린 배 안에서 신하들과 술을 마시는데, 가을바람이 소소하게 불고, 기러기가 남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갑자기 감회가 일어 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추풍사(秋風辭)’다. “가을바람 일어나니 흰구름이 나는구나(秋風起兮白雲飛)/초목이 누렇게 떨어지니 기러기는 남쪽으로 돌아가네(草木黃落兮?南歸)/난초는 빼어나고, 국화는 향기롭구나(蘭有秀兮菊有芳)/아름다운 사람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佳人兮不能忘)/루선(樓船) 띄워 분하를 건너도다(泛樓船兮濟汾河)/강물을 가로지르니 흰 물결이 이는구나(橫中流兮揚素波)/피리소리 북소리 드높도다 뱃노래를 불러라(簫鼓鳴兮發棹歌)/환락이 극에 달함이여 슬픈 감정 많도다(歡樂極兮哀情多)/젊음이 얼마이겠는가 늙는 것을 어찌하리요(少壯幾時兮奈老何)” 한 무제는 원정(元鼎) 4년(서기전 113) 11월을 비롯해서 원봉(元封) 4년(서기전 108), 원봉 6년(서기전 105), 태초(太初) 2년(서기전 103), 천한(天漢) 원년(서기전 100) 때도 분양에 행차해 후토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한무제고사(漢武帝故事) 등의 중국 사료들은 서기전 113년으로 유추하고 있는데, “젊음이 얼마이겠는가”라는 싯구에서 그의 만 44세 정도 때가 아니냐는 논리다. 무제는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한사군(漢四郡)을 실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추풍사는 권력을 한 손에 쥔 제왕의 위세보다는 한 인간의 쓸쓸한 감회가 더 크게 느껴진다. 명(明)나라 때 사진(謝榛)은 사명시화(四溟詩話)에서 ‘추풍사’의 앞 구절은 한 고조 유방의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는구나(大風起兮雲飛?)”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평가했다. 그런데 “환락이 극에 달함이여 슬픈 감정 많도다”라는 구절은 그의 모순된 심정을 잘 말해준다. 극에 달한 권력의 기쁨보다는 밀려오는 슬픔이 앞서 있다. 무제의 가을은 왜 이리 쓸쓸했을까? 퇴계 이황의 문집인 퇴계선생문집 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에 ‘한가하게 무이지(武夷志)를 읽고서’라는 대목이 있다. 그 중 ‘경성(傾城)’에 대한 설명에서 이황은 “이 부인이 한 번 돌아보니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니 나라가 기운다”라고 말했다. 이 구절은 한서(漢書) ‘효무이부인(孝武李夫人) 열전’에 나온다. 이 부인이 무제를 만나는 배경에 대해 재미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부인의 오빠 이연년(李延年)은 음악을 잘 알고, 가무(歌舞)도 잘해서 무제가 사랑했다. 매번 새로운 목소리로 곡조를 바꾸어 노래하니 듣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연년이 임금을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일어나 춤추면서 노래했다.”(한서 ‘효무이부인 열전’) 그 다음에 퇴계 이황이 설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세상에서 벗어나 홀로 서 있네(北方有佳人/絶世而獨立), 한 번 돌아보니 성이 기울고/두 번 돌아보니 나라가 기우네(一顧傾人城/再顧傾人國), 성이 기울고 나라가 기우는 것을 어찌 모르랴만/아름다운 사람은 다시 얻기 어렵기 때문이지(寧不知傾城與傾國/佳人難再得)” 여기에서 나라를 기울게 하는 미모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이는 이연년이 자신의 누이를 무제에게 소개하는 노래였다. 무제가 “좋도다! 세상에 어찌 이런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평양(平陽)공주가 이연년의 동생이 있다고 소개했고, 그를 본 무제는 매혹당했다. 그후 이 부인이 병들어서 무제가 문병을 가려 하자 이 부인은 “오래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용모가 망가져서 황제를 뵐 수 없다”고 거절할 정도로 미모에 매달린 여인이기도 했다. 이 부인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아름다운 사람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라고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가 덧없다고 노래한 것이다. 반면 조선 후기 정조는 세손(世孫) 시절 ‘그림 부채에 제(題)한 시’에서 가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 없는 강물은 거울처럼 맑은데(江水無風鏡面淸)/그 누가 뱃노래를 알아들을까(誰人解聽棹歌聲)/갈대 무성한 작은 언덕에 가을 햇볕 옅은데(蘆花小岸秋光淺)/같은 빛 아득한 하늘에 저녁노을 일어나네(一色遙天晩靄生)”(춘저록(春邸錄), 홍재전서) 여인의 죽음에 반쯤 미쳐서 “환락이 극에 달함이여 슬픈 감정 많도다”라고 읊은 무제에 비하면 부친 사도세자를 비명에 잃은 아픔을 겪고도 가을을 맞는 세손의 감정처리가 훨씬 담담하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무제를 영생불사를 위해 신선을 찾고 영약(靈藥)을 손에 넣으려 분주한 인물로 그렸다. 반면 정조는 극도의 인내로 부친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성공한 임금이 되었다. 슬픔의 깊이 또한 훨씬 깊었을 정조의 가을이 그래서 더 와닿는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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