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주 땅에서도 어떤 마을에선 ‘곶’이라 하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자왈’이라 불렀다. ‘산 숲’혹은 ‘잡목과 가시덤불이 있는 숲’을 이르는 제주방언이다. 그러던 것이 2000년 제주 지질에 관한 한 논문에서 두 단어를 합쳐 ‘곶자왈’이라고 공식적으로 처음 표기했다. 이 후‘곶자왈’은 10여년 만에 단박에 제주를 대표하는 일반명사의 위치에 올랐다. 학술용어를 제주방언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곳의 지질구조와 식생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곶자왈, 그건 지명이 아니라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한때는 한라산 자체만으로도 제주는 훌륭한 관광지였다. 근래에는 올레길이 대세지만, 이제 제주의 속살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곶자왈을 꼭 여정에 포함시킨다.
곶자왈,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환상의 숲
우와~, 흔히 글로 표현하기 힘든 풍경을 만날 때는 감탄사로 대신한다. 그리고 언어로 부족한 부분은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충한다. 곶자왈은 그 둘을 다 동원해도 제대로 표현할 재주가 없었음을 미리 고백해야겠다.
제주어사전에는 곶자왈을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어수선하게 된 곳’이고, 곶자왈생태체험 교육자료에는 ‘용암이 크고 작은 암괴로 쪼개지면서 요철지형을 이루며 쌓인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거칠게 정의하면 곶자왈은 바위 덩어리 위에 형성된 숲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도 넓은 암석지대에 바위 사이로 뿌리를 내린 풀과 나무가 만들어 낸 환상적인 숲이다. 바위는 두께가 20m가 넘는 것에서부터 사람 머리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 빠짐이 좋아 삼다수로 유명한 제주 용천수의 근원이고, 이산화탄소를 정화하는 제주의 허파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북은 경사가 급해 하천이 발달하고, 동서지역은 경사가 완만해 곶자왈이 많이 남아 있다. 돌 무더기이기 때문에 이용이 불편한 것도 긴 세월 동안 잘 보존된 이유 중 하나다. 소규모 농사와 방목, 숯 채취 정도는 있었지만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곶자왈의 기반인 암괴지형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교래곶자왈은 그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온대와 난대 식생이 섞여 있어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곳이다. 입구인 교래자연휴양림에서부터 도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숲이 펼쳐진다. 입구에서부터 하늘을 덮은 원시림이다. 구멍 난 돌로 경계를 지은 산책로를 제외하면 녹색이끼를 뒤집어 쓴 크고 작은 바위가 온통 숲을 뒤덮고 있다. 고사리와 관중 등 양치식물이 바위틈을 메워 초록 덮개를 만들고, 송악과 줄사철나무 등 덩굴식물이 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 신비로움을 더한다. 곶자왈의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역시 바위를 움켜쥐고 숲을 형성한 나무들이다. 땅속에 있는 나무뿌리를 이곳에선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틈새를 파고든 모든 나무뿌리가 바위모양을 따라 살아 움직이듯 흘러내린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려는 듯 이곳에서는 한 줄기로 쭉쭉 뻗은 나무를 보기 힘들다. 바닥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가지가 벌어졌다. 땅속 깊이 파고 들지 못하고 뿌리 채 뽑혀 스러진 나무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흙 바닥인 양 터무니없이 덩치를 키운 나무들은 욕심을 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한 눈에 내려다보는 중산간 평원의 단풍
물기 머금은 바위 이끼 위로는 천천히 달팽이가 기어 다니고, 보일 듯 말듯 높은 나무 가지에선 오색딱따구리가 먹이를 찾고 있다.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내달은 노루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숲 속 이방인을 쳐다본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유해동물로 지정돼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깝다. 큰지그리오름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는 편백나무 인공조림을 만나기까지 약2km 구간 내내 환상적인 숲길이다. 그 사이 움집과 숯가마 잣성(목장의 경계를 하기 위한 돌담) 등 곶자왈에 의지해 생계를 꾸렸던 흔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편백나무 숲길을 통과하면 그제서야 조금 가파른 오르막이고 이내 큰지그리오름 전망대에 닿는다.
중산간 지대에 넓은 평원을 형성하고 있는 교래곶자왈과 아래쪽 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 속을 걸을 땐 온통 초록일 것 같았는데 의외로 울긋불긋하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고원의 단풍은 제주의 또 다른 풍경이다. 다른 곶자왈이 해발 200~400m인데 비해 이곳은 400~600m 지대에 위치해 낙엽활엽수가 많기 때문이다.
대규모 개발위험에 처한 곶자왈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가 ‘곶자왈공유화재단’이다. 2007년 ‘곶자왈한평사기운동’으로 시작한 이후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는 드물게 36억 원을 모아 지금까지 약48만㎡(14만5천평)의 곶자왈을 사들였다. 민?관과 기업까지 곶자왈의 생태적 중요성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작 당시 3.3㎡당 1만원에 불과하던 땅값이 지금은 7~10만원까지 올라 아직도 사유지로 많이 남아있는 곶자왈의 추가매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미영 공유화재단 사무국장은 “곶자왈은 자체로도 훌륭한 생태자원이지만 한라산과 해안을 잇는 제주의 생태 축”이라며 더 많은 개인과 기업?단체가 곶자왈 보존에 함께해달라고 당부했다.
가을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하산 길의 곶자왈은 더욱 어둑어둑해져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다는 불찰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이不如一見) 이라는 상투어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편견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주 여행객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곶자왈을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도 있으리라.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여행메모]
●교래곶자왈은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다. 교래자연휴양림을 찍고 가면 쉽다. 입장료는 1,000원. ●교래곶자왈은 큰지그리오름까지 오르는 산책로와 생태탐방코스로 구분돼 있다. 왕복 3시간 정도의 산책 겸 등산이 부담스럽다면 1시간30분 정도 산책할 수 있는 생태탐방로를 이용하면 된다. ●곶자왈의 본 모습은 여름이 제격일 것 같지만, 전문가들은 오히려 겨울을 추천한다. 초록 덮개에 하얀 눈이 쌓이면 신비로움이 더하고 암괴지형의 특성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래곶자왈은 낙엽활엽수가 많아 단풍을 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한 겨울에도 초록색 숲이 그립다면 상록활엽수가 많은 동백동산을 추천한다. 람사르습지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곶자왈에는선 산책로를 벗어나면 위험하다. 하천도 없고 기준이 될만한 지형지물이 없어 길을 잃기 쉽다. ●휴양림 바로 옆의 돌문화공원도 추천할 만 하다. 수석을 전시한 공간이 아니다. 30만평의 넓은 평원에 제주도 탄생신화인 설문대할망 설화를 모티프로 꾸민 공원이다. 주변경관을 해치지 않게 지하에 건설한 박물관은 화산과 용암이 만들어낸 제주 지형의 특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전시했다. 조명과 그림자까지 고려한 섬세함이 돋보인다. 돌하르방뿐 아니라 비석을 대신한 동자석과 말방애(연자방아) 등 돌에 얽힌 제주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야외 전시물도 재미를 더한다. 입장료는 5,000원(청소년 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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