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 하는 연극인데도 안 풀리면 대책이 없다.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여지없다.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1930년대 신파극을 ‘홍도’라는 이름으로 바꿔 준비 중인데 쉽게 봤다가 된통 욕을 봤다. 우환은 겹쳐서 왔고 나는 창의적이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좋아하지 않던 짜증도 많이 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남을 탓하고 형편을 탓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 연극계로 들어올 때 과연 연극을 잘 할 수 있을까 불안에 떨었다. 그때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딱 들어왔다. ‘나를 이기는 동양학’이라는 강좌였다. 냉큼 신청을 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맨 앞줄에서 강의를 들었다. 마지막 과정이 계룡산에 들어가서 명상하는 코스였다. 물론 거기도 갔다. 그때 선사께서 무엇을 얻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다고 말했다. 네가 주먹을 꼭 쥐고 있는데 그게 얻어지겠냐며 오전 내내 평화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를 말하지 말고 생각해 보란다.
계곡물이 졸졸 흐르는 옆으로, 널따란 바위에 도인처럼 폼을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을까 고민하는데 계속 딴 생각이 났다. 어떻게 먹고 살까, 연극이 비전은 있을까, 장가도 가고 싶은데… 그래도 역시 평화는 얻고 싶었던지 계속 원점으로 돌아와 평정을 갈망했다. 다리가 저리고 엉덩이도 아팠다. 그래도 몸을 비틀면서 세 시간 너머 있었다. 점심시간 전에 나는 평화를 얻는 방법을 깨닫고 싶었다. 초조하게 조바심을 치던 차에 푸른 밤나무가 보였다. 그리고 다닥다닥 열린 덜 익은 풋밤들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 때였다. 저절로 두어라! 마음의 평화는 가만히 놔둘 때라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 무엇이다. 풋밤도 때가 되면 아람이 되어 가시 옷을 벗고 떨어지듯 평화도 역시 그럴 것이다. 16년 전, 대단한 확신에 차서 기고만장했던 잊지 못할 깨달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후 평화를 얻고 사는데 실패했다. 저절로 두지 못했다. 조바심치고 보챘다. 가끔 그것을 왜 잊고 살았을까 하며 몇 번 반성은 했으나 깜박깜박 잊고 그것을 내 삶의 근간 삼아 살지는 못했다. 길이 안 났기 때문이다. 매번 연극을 할 때마다 저절로 될 때를 기다리지 못해 옹졸하게 설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왜 기다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번도 마찬가지다. 배우들의 스케줄상 나중에 모두의 합이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배우들이 대본을 놓기에는 빠듯한 스케줄이었고 더블캐스팅에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생경했다. 그러니 일단은 모두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신뢰하면서 기다려야 옳았다. 더욱이 나의 스케줄도 엉망이었다. 이래저래 벌여놓은 일들도 많아 집중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아랑곳없이 풋밤을 까면서 투덜거렸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내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자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돌았다. 배우들은 무대에 설 용기를 잃었고 스케줄에 떠밀려 우왕좌왕했다. 늘 긍정하면서 연극하자던 그 훈훈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오랜만에 하는 극단 작업이라 잘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하룻밤을 고민 고민하다 잤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배우들에게 말했다. 성급했습니다. 기다립시다. 배우들이 모두 다 찰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면 한꺼번에 풀릴 겁니다. 그 날부터 연습은 다시 에너지를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들의 연습량이 부족했고 스케줄은 더 엉켰다. 다시 하룻밤을 고민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엉킨 실타래를 애써 풀려고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반드시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을까. 하지만 정말로 다 풀렸다. 주인공들도 여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흙탕을 밀어낸 샘물처럼 주변을 서서히 정화시켰다. 다시 생기가 돌면서 행복이 밀려왔다. 맞다. 우환은 예외 없이 겹쳐서 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를 단단히 다져 놓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훌쩍 떠난다. 때가 되지 않으면 몸부림 쳐 봐야 물러서지 않는다. 제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리면 저절로 없어진다. 나는 우리 연극이 멋지게 올라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안 그럴 까닭이 무엇인가.
고선웅 연극 연출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