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함경도 원산 출신의 김영하(金永河)와 오희영(吳熙泳)은 함흥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위반으로 각각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그 혐의사실이 요상하다. 간도(間道)에 있는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고는 원산으로 들어와 김병제(金秉濟)에게 적십자회 가입을 권유했다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제강점기라도 적십자회 가입을 권유한 것이 왜 처벌대상일까? ‘대한(大韓)’적십자사라는 명칭 속에 답이 있었다. 적십자사는 1859년 스위스의 앙리 뒤낭이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참혹성을 목도하고 전시상병자 구호를 위한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다. 186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17개국 대표가 모여 ‘전시상병자 구호, 병원ㆍ의료종사자의 중립화, 적십자 표장의 채택’ 등을 규정한 ‘제네바 협약’을 채택하고 적십자를 조직했다. 흰 바탕 위에 붉은 십자가가 있는 적십자 마크는 창시자 뒤낭의 조국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스위스 국기의 배색(配色)을 거꾸로 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1903년 적십자 조약에 가입하고, 1905년 10월 27일 고종 황제의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반포해서 출범시켰다. 그러나 1906년부터 통감(統監)통치를 자행하던 일제는 망국 1년 전인 1909년 7월 칙령67호로 대한적십자사를 폐지하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격하시켰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 4월에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해 7월 임정 내무부령 제62호로 대한적십자사를 부활시킴으로서 서울에는 조선총독부 산하의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있고,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적십자사’가 있게 되었다. 제령 위반으로 체포된 두 명의 적십자사 회원들은 당연히 대한적십자사 간도지부 회원들이었다. 대한적십자사장은 의사(醫師) 이의경(李羲景)이었는데, 재미한인사략(在美韓人史略)에 따르면 1919년 10월 경 상해에서 시애틀을 방문한 이의경이 각지를 순회하면서 그 해 12월까지 1만300여원의 의연금을 모집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대한적십자사 사원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일제는 대한적십자사 사원들이 국내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들으면 잔뜩 긴장해서 체포에 열을 올렸다. 1921년 7월 진주(晋州) 경찰서에서 정몽석(鄭夢錫)을 취조한 결과 대한적십자사 사원 두 명이 서울 시내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일제의 취조란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뜻이다. 종로경찰서는 서울시내 안국동에서 최웅림(崔雄林)과 구여순(具如淳)을 체포해 진주경찰서로 압송했는데, 이들 역시 혹독한 취조결과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 사원 가입 권유를 위해 밀입국했다고 자백했다. 1921년 8월 26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최웅림은 적십자사 가입은 권유했지만 군자금을 모금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고, 정몽석은 “대한적십자사는 만주지방 동포를 구제하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서 불온한 사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시카와(石川) 검사는 ‘대한(大韓)’ 두 자가 이미 불온한 것이라며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구형했고, 나가시마(永島) 판사는 구형대로 확정했다. 제령 7호는 3ㆍ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놀란 일제가 부랴부랴 만든 법령이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 1919년 4월 15일자에 따르면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에 관한 제령’인데, 제1조는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려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고, 3조는 “제국 외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일본신민(臣民)도 이를 적용한다”는 것으로서 국외 독립운동자들과 임시정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적십자사 사원들은 큰 고초를 겪었다.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사 회장이었던 안창호가 사퇴하자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安定根)이 대리 회장이 된 적도 있다. 이때 만주 및 러시아 지방에 독립군을 치료하기 위한 군사병원(軍事病院) 설립을 결의하는 등 대한적십자사는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리던 해방이 되었다.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는 사라지고 대한적십자사가 이 땅에 들어설 차례였다. 1947년 3월 조선적십자사로 재건되었던 적십자사는 1949년 10월 대한적십자사로 제 이름을 찾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 신궁참배(神宮參拜)에 앞장서고, 미영(美英)타도 좌담회를 개최했던 친일목사 양주삼(梁柱三)이 총재로 선출되면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이후 대한적십자사는 많은 구성원들이 음지에서 헌신하면서 우리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지만 일부 총재들의 친정부 행각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뺑소니 출장’이란 신조어를 낳은 현재의 김성주 총재 같은 인물은 들어보지 못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우리 사회의 음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가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자리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비정상이 언제나 정상이 될 것인지 답답한 현실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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