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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교당엔 하얀 서리 위로 검은 상투가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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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교당엔 하얀 서리 위로 검은 상투가 뚝뚝 떨어졌다

입력
2014.10.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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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6월 29일

공주 우금치전투 반면교사 삼아...상주 은척면 우기리에 교당 건립

경전간행사업으로 동학사상 유포

·1943년 11월 25일

日警, 최제우 탄신일 동틀 녘 급습...교도 상투 싹둑 잘라 줄줄이 연행

경전·가사·목판·예복 등 전부 압수

·1944년 12월 28일

김주희 "때가 되면 다 된다" 유언...祭집전하던 헌성실 옆방서 순도

정신적 지주 사라지자 교당 와해

상주동학교 김주희 교주. 이 사진은 경오년(1930)4월 5일에 찍은 것인데, 4월 5일에 찍은 것인데, 4월 5일은 수운 최제우가 득도한 날이다.
상주동학교 김주희 교주. 이 사진은 경오년(1930)4월 5일에 찍은 것인데, 4월 5일에 찍은 것인데, 4월 5일은 수운 최제우가 득도한 날이다.

그날 아침은 서리가 새하얗게 내렸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저고리며 소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새벽부터 교인 40~50명이 모여들었다. 이날은 음력 10월 28일로 교조 최제우의 탄신일이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얼른 제(祭)를 올리고, 아침 한 술 뜨고 서둘러 파 하려던 참이었다. 며느리 곽아기(89) 씨는 “밥이 익었나 싶어 솥뚜껑을 열어보다가 우연히 대문 담장 쪽으로 시선이 갔는데, 웬 낯선 남자가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고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곽 씨는 이상타 여기면서도 아침상 준비를 서둘렀다. 꼭두새벽부터 그 많은 인원의 식사를 혼자서 책임져야 했으니 딴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로보다 세로가 3배쯤 긴 부엌 바닥에는 소반 스무남은 개가 이열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부엌 옆방에는 교주 김주희와 원로 교도 대여섯이 화로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시국을 논하고 있었다. 나머지 교인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아침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슴새벽이었다.

일제는 1943년 동학 교조 최제우의 119번째 탄신일에 상주동학교당을 습격한다. 일제는 교도들의 상투를 싹둑 잘라 치욕을 준 뒤 상주경찰서 구치소로 연행해 갔다. 이날 구치소에는 300여명의 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제가 교인명부를 확보해 전 방위로 탄압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43년 동학 교조 최제우의 119번째 탄신일에 상주동학교당을 습격한다. 일제는 교도들의 상투를 싹둑 잘라 치욕을 준 뒤 상주경찰서 구치소로 연행해 갔다. 이날 구치소에는 300여명의 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제가 교인명부를 확보해 전 방위로 탄압했기 때문이다.

곽 씨가 막 밥을 퍼도 되겠다 싶었을 때, 긴 칼을 찬 검은 제복의 일경(日警) 수 십 명이 들이쳤다. 교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일부는 도망가고, 나머지는 꼼짝없이 붙잡혔다. 장정 교인 대여섯이 황급히 부엌으로 뛰어들어 뒷문으로 도망치려다 순사들과 뒤엉켜 소반이 부서지고, 부엌문도 박살났다. 오물 묻은 구둣발로 교당의 방이란 방은 다 헤집고 다녔다. 백발의 김주희는 “이런 숭악한 놈들! 이 무슨 짓이냐!”며 대로(大怒)했지만 소용없었다. 교인들은 마당에 꿇어앉은 채 포승줄 신세가 됐다. 그 옆으로 순사들이 압수한 경전, 가사, 목판, 예복, 교기가 폐물인 냥 산을 이뤘다. 순사 서넛은 가위를 꺼내들었다. 교도들의 상투를 잡히는 대로 싹둑싹둑 잘라나갔다. 당황한 동학도들은 멍석 위로 뚝뚝 떨어진 머리카락을 묶인 두 손으로 옥이야 금이야 주워 감싸 쥐었다.

일경의 진압작전이 일단락되자, 그 우두머리는 곽 씨에게 “주먹밥을 만들라”고 했다. 혼비백산한 곽 씨가 고개를 젓자, 저들끼리 뭐라고 하더니 동네 아줌마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그렇게 주먹밥을 만들었다. 눈물도 안 나왔다. 주먹밥을 받아든 교인들은 그제야 이 상황이 분하고, 기가 막힌 듯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하나 여든셋 백발의 교주는 마지막까지 위엄을 잃지 않았다. 눈물의 주먹밥을 먹은 교인들은 상주경찰서로 줄줄이 끌려갔다. 1943년 11월 25일의 일이었다.

이날 수난당한 동학도들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다. 일제는 교인명부를 확보하고, 작심하고 잡아들였다. 상주경찰서 구치소에는 붙잡혀 온 동학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곽 씨는 “한 300명쯤 잡혀 들어갔다가 일부는 동학 탈퇴서를 쓰고 풀려났지만, 나머지는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며 “그 후유증으로 일찍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김주희는 다행히 이듬해 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1944년 9월 부주교 김낙세(1869~1944)가 고문으로 옥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곡기를 끊은 뒤 끝내 부주교 곁으로 갔다. 그해 12월 28일 오후 6시쯤, 제를 집전하던 헌성실(獻誠室) 옆방에서 84세의 일기로 순도(殉道)했다. 외딴 산중에서 영욕의 세월을 살다간 그는 “때가 되면 다 된다. 걱정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상주동학 교주 김주희(1860~1944)는 기골이 장대했다. 키는 8척(184㎝)쯤 됐고, 2m짜리 왕죽(王竹)을 지팡이로 삼았다. 성품은 아주 엄격하고도 괴팍스러운 데가 있었다. 곽 씨는 “안채 마루에 서서 불호령 내리며 왕죽을 내리치시면 처마가 들썩거릴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1860년 충남 농부 김윤집(1823~1881)과 단양 우씨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주희를 동학으로 이끈 사람은 아버지 김윤집이었다. 김윤집은 제 뜻과 무관하게 집안 어른의 양자로 갔다가 홀대받자 동학도가 됐다. 김윤집은 후에 충청지역 동학 총책을 지냈다고 전해지지만, 행적은 묘연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간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동학사상이 뇌리에 박힌 김주희는 전라도 글방선생이었던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안으로는 문란하고 타락해질 대로 타락한 조선지배층에 맞서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는 삶을 운명으로 생각했다.

우리네 역사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대단한 모순의 현실화였다. 조선 황실이 다름 아닌 일제와 합세해 우리 민초들을 잔인하게 짓밟은 아이러니의 역사였다. 조선왕조 500년간 조선의 주인은 ‘민(民)’이 아닌 응당 ‘왕’이었기에 동학농민군은 탄압의 대상이었다. 하나 동학농민혁명군 입장에서는 ‘주인이 주인답지 못한’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구국ㆍ애민의 발로였다. 단초는 전북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였다고는 하나, 이미 계사년(1893) 세밑 조선 정국은 망조(亡兆)의 폐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농민에 대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극에 달하였고, 농민들은 세(勢)를 뭉쳐 일어설 때를 탐하고 있었다. 이런 중에 나라 밖에선 일본과 청국이 조선반도를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니까 동학농민혁명은 운명의 수레바퀴 세 개가 전속력으로 부딪친 결과라 할 것이다. 그 불씨를 녹두장군 전봉준이 당겼던 것이고.

혹자는 단정한다. ‘전봉준이 대원군과 손잡고 조선의 주인집(경복궁)을 점령했더라면 또 다른 왕조가 탄생했을 것이다. 그러니 동학농민의 역사를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 하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어쩌면 가정이야말로 허우대 멀쩡한 자의 헛소리에 불과한 게 아닐까.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좀 더 냉철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논리라면, 차라리 동학농민혁명 틀 안에서 이야기되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 예컨대 동학농민군 중 돌아가는 사정에 따라 관(官)에 붙었다가 농민군에 붙었다가를 밥 먹듯 한 사이비 동학농민 사례를 추리는 것이다. 또는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에 천착한 나머지 외세의 침략을 등한시한 결과, 조정(朝廷)이나 동학농민군이나 나머지 백성들에게는 역적(逆賊)이나 진배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든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흐려질까. 역사가 증언하듯 동학농민혁명의 운명을 가른 대전(大戰)은 우금치전투였다.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이 한편을 먹고, 동학농민군과 적이 된 전투에서 16만 7,000여 명이었던 동학농민군은 500여 명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는 전쟁이라기보다 살육이라 해야 적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3,000명이 채 안 된 관군ㆍ일본군 연합군은 개화의 상징인 서구식 신무기를 앞세웠고, 동학농민군 대다수는 대나무로 만든 창과 재래식 무기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현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였으나, 그 절박한 심정을 ‘무지하다’거나 ‘무모하다’는 말로 싹둑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숱한 주검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ㆍ평등을 당연한 권리요, 책임으로 생각할 수 있음을 부정할 텐가.

하나 그것 이상의 무엇이 또 있었다는 것을 김주희 사례는 말해주고 있다. 김주희는 우금치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괴나리봇짐 하나 둘러메고 ‘시체밭’에서 벗어났다. 그는 충남 갑사(甲寺)로 피신해 숨을 돌린 뒤 연합군의 감시망을 뚫고 충북 괴산-전북 무주-충북 영동-충북 옥천-충북 보은 등을 전전하다 속리산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보기에 우금치전투는 개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우금치전투 이후 동학도의 결집은 하나마나였다. 간간이 각개전투가 벌어졌지만, 연합군에게 족족 도륙되었다. 숨이 붙은 동학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나 연합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히 한반도를 삼킬 야욕을 품고 있던 왜놈들에게 동학농민군은 후환거리였다. 씨 말리기에 돌입했다. 숨이 붙은 동학도들은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동학도들이 꿈꿨던 ‘민이 주인 되는 세상’은 물거품이 된 듯했다. 참담하고, 지극히 암담한 현실이었다.

헌데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전개됐다. 조선의 주인이 갈릴 것 같았다. 황제는 명목상 주인이요, 일제가 심정적 주인으로 그 위세가 나날이 높아갔다. 고종의 아관파천은 그걸 방증한다. 고종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절박하고 혼란스러웠던 50여 년을 살았다. 그건 사실이다. 그렇대도 군주로서 백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명백한 과오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그것을 상쇄시키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고종은 백성을 지키지 못했고, 나라를 빼앗겼다. 그 나라를 되찾은 건 숨죽였던 우리네 민초였다. 그 선두에 동학도 손병희가 있었다. 수운 최제우의 적통을 이은 그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3ㆍ1 독립운동의 틀로 옮겨왔다. 우리 역사는 손병희와 그 휘하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현장주의자들’이라고 하자.

하지만 난세에 현장주의자들만 있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방식만이 애국^애민의 정답이었을까. 김주희의 동학 노선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 무리의 동학도들은 상주 속리산에 숨어 지내던 김주희 곁으로 모여든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 역사가 기억하는 동학은 1905년을 기점으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천도교다. 이 점은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인 올해 기념일 행사를 주도하는 쪽은 천도교다. 손병희는 2대 교주 최시형에 이어 3대 교주로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 그런 그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 이유는 뭘까. 천도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은도(隱道)의 시대를 벗어나 현도(顯道)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라고. 이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연합군의 탄압으로 숨어 지냈지만, 그 정신은 잃지 않고 다시 때를 보고 있다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현장주의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있다. 겉으로는 일제가 동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는 동학도 간 내분이다. 손병희가 3^1 독립선언식 후 일제의 눈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보니 동학도 일부가 일제와 붙어먹은 거였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손병희 파(派)가 천도교를 선포한 이유다. 1905년 12월 1일이었다.

한편 김주희는 우금치전투를 반면교사 삼아 교조 최제우의 정신을 대대손손 물려주는 데 매진했다. 동학의 핵심사상은 ‘만인 평등’이다. 최제우의 언어로는 ‘적서차별 철폐’다. 최제우는 서자(庶子)였다. 그는 모순투성이인 조선조의 전통질서를 비판하는 동시에 서양의 근대적 질서 또한 거부했다. 어쨌든 우리 안에서 우리의 것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실이 동학이다. 동학은 유불선(儒彿仙)과 민간신앙이 두루 뒤섞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융합이자 통섭의 결정체랄 수 있지만, 당대에는 이단으로 취급받은 이유다. 그의 죄명도 ‘사이비종교로 세상을 어지럽힘(左道亂政)’이었다. 그는 1864년 3월 10일, 경상감영 장대(將臺)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망나니가 목을 베는 순간 광풍이 불고, 회화나무 잎사귀에서 수액이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양민(良民)이었던 최제우는 살아생전 자신의 여종 2명을 한 명은 며느리고 삼고, 또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을 만큼 시대를 앞서 살았다.

김주희에게 이런 최제우의 삶은 시대 상황에 비춰 귀감이 되었을 법하다. 손병희와 그 휘하의 현장주의 노선도 용전분투했지만, 김주희의 정신교육 노선도 만만치 않게 힘겨웠다. 우여곡절 끝에 1915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교당 터를 잡고 근 30년 세월을 일제와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어찌되었던 사즉생(死卽生) 정신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일제를 치 떨리게 만들었고, 일제강점기 내내 동학도는 건드리면 골칫거리요, 그냥 놔두기에는 불안한 계륵 같은 존재였다. 실제 조선총독부의 깐족거림이 심심찮게 자행됐다. 기록에 의하면 1917년 10월 1일 ‘상주소장 1명, 보조원 1명, 외서소장 1명, 보조원 1명이 또 집에 와서 가택수색’했고, 1919년 2월 28일에는 ‘외서 김달용과 보조원 1인이 마당에 들이닥쳐 백수 씨를 불법구타하고 경전을 가져’갔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19년 손병희 노선이 가담한 3^1운동을 계기로 눈에 띄게 누그러진다. 일제가 조선통치의 방식을 문화정치 쪽으로 선회하면서 상주동학도를 대하는 태도 또한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총독부는 비공식적으로 동학을 인허하고, 김주희는 경전^가사간행사업을 추진한다. 교세도 나날이 좋아져 1920년대 후반 동학도는 1,500명을 웃돌았다. 그러나 1936년 6월 경찰당국이 일방적으로 해산명령을 통보해 오면서 또 다시 숨막히는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집회도 몰래 하고, 간행사업도 몰래 해야 했다. 그러다 119번 째 최제우 선생 탄신일에 사달이 난 거였다. 며느리 곽 씨는 “그날 아침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한바탕 격랑이 휩쓸고 간 교당에는 열 살 된 시동생과 여섯 살 난 시누이, 그리고 곽 씨만 덩그러니 남았다. 곽 씨는 충북 영동서 시집온 지 3년째로 열아홉이었다.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題字: 혜정 류영희

☞ (1) 프롤로그-상주동학을 아시나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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