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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여행 "떠나는 이유 따윈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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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여행 "떠나는 이유 따윈 없어"

입력
2014.10.2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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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조제(이케와치 지즈루)가 읽는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를. 주인공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쓸 정도로 좋아하는 소설이다. 조제 아니, 쿠미코는 안다. 자신도 조제처럼 홀로 남아 고독해 질 것을. 그래서 1년 몇 개월을 같이 살던 츠네오(쓰마부키 사토시)가 출근하듯 담담하게 떠날 때 조제는 눈물 대신 도색잡지 ‘SM킹’을 선물로 건넨다.

츠네오가 고백한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집을 나선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 가나에(우에노 주리)와 길을 걷다 흐느낀다. 겨울바람에 눈물이 부서져 내린다. 허리가 꺾이고 무릎이 꺾이고 팔에 힘이 풀리면서 겨우 붙잡고 있던 마음이 무너져 길바닥 위로 흘러내린다. 2000년대 일본 연애영화 사상 가장 슬픈 이별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이 대목은, 언제 봐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찬바람이 심장을 파고드는 늦가을엔 더욱 더.

이누도 잇신 감독의 최고작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에서 바람둥이 대학생 츠네오는 판자촌에서 사는 장애인 소녀 조제를 좋아한다. 처음엔 조제와 그의 할머니가 해주는 밥이 맛있어서 찾아가다 시나브로 소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어떤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순수한 관심과 애정일까, 아니면 연민과 호기심 또는 책임감일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가 된 조제를 지켜주기 위해 츠네오는 동거를 시작한다. 1년쯤 지나 츠네오가 자신의 고향에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을 때 조제는 결혼 대신 이별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자며 찾아간 러브호텔의 조개 껍질 모양 침대에서 조제는 말한다. “깊고 깊은 바다 속에서 난 헤엄쳐 나왔어. 빛도 소리도 바람도 비도 없고 정적만 있는 곳. 하지만 난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 껍질처럼 혼자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 장면

조제와 츠네오가 바다로 향할 때 나오는 곡이 쿠루리의 ‘하이웨이’다. 1997년 3인조로 정식 데뷔한 쿠루리는 기시다 시게루(보컬ㆍ기타)와 사토 마사시(베이스)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멤버 변동을 겪었던 교토 출신 모던 록 밴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맡은 건 2002년 네 번째 앨범 ‘더 월드 이스 마인’을 내놓은 후다. 국내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 영화 덕분에 유명해졌고 얼마 전엔 내한공연도 치렀다.

츠네오의 오열을 돕는 현악 연주 ‘이별’과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이 연상되는 피아노 연주곡 ‘츠네오와 조제’도 좋지만 이 사운드트랙의 백미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사가 붙은 버전으로 흘러 나오는 ‘하이웨이’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 대략 백 가지쯤 있어 / 첫 번째 이유는 / 여기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어 / 두 번째 이유는 / 오늘밤 달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야 / 세 번째 이유는 / 운전 면허를 따도 괜찮겠다고 /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 나는 차에 우퍼 스피커를 (달리자 고속도로로) / 달고 멀리 미래를 울리지 (오랜만이야) / 무언가 큰 일을 해보자 / 반드시 큰 일을 할 거야”

차분하게 달리는 속도감으로 노래하는 쿠루리는 가벼운 발걸음의 드럼과 기타 위로 여행을 노래하다가 슬라이드 기타로 가슴을 쓸고 간 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따윈 없다”면서 천천히 힘을 뺀다. 첫 여행의 들뜬 마음과 이별을 준비하는 쓸쓸함이 노래 속에서 겹쳐 흐른다. 의자 위에서 요리하던 조제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화면 밖으로 사라지듯 노래도 자취를 감춘다. 여행의 종착역은 이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조제를 비추던 빛이 조각조각 떨어져 사라진다. 그리고 ‘하이웨이’도 ‘차가운 꽃이 떨어져 버릴 것 같아’라며 끝난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중 ‘High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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