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ㆍ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사건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를 권력욕에 찌들어 상사를 살해한 ‘패륜아’로 규정했다. 반면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을 민주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유신 정권을 지지하는 한 축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이 오랫동안 충성을 바친 대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민주주의를 위해 죽였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러나 김재규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는 “직접 만나 본 김재규는 군인 출신답지 않게 점잖고 진정성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안 변호사는 “김재규는 1979년 봄 ‘자유민주주의’라는 서예 작품을 쓰는 등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유신 체제 성립 후 계속 박정희 대통령을 죽일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재규가 별다른 준비 없이 ‘혁명’을 결행한 것에 대해서는 “박정희만 죽이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한 국민과, 박정희 정권과 사이가 나빴던 미국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 변호사는 “10ㆍ26이 민주화로 이어졌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당시 검찰관으로 재판에 참여했던 전창렬 전 육군본부 검찰부장은 “김재규가 유신 정권의 억압적인 태도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고 부마항쟁에 대해서도 박정희나 차지철과 다른 입장이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김재규 자신은 명예욕이 상당했고 자신이 정권을 쥐면 정치를 더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재규가 평소 박정희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날의 사건에는 우발적인 요소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을 보면 김재규는 세밀한 계획 없이 소수의 인원만을 움직여 대통령을 살해한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에 기대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전 전 검찰부장은 “대통령 살해 자체는 그 날 연회장에서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기에 갑작스레 결행한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재규의 개인적 의도와 무관하게 10ㆍ26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의견도 있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김재규가 평소 민주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할 만한 확고한 근거가 없다. 그는 유신 정권의 한 축이었고 YH무역 노조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강경 진압하도록 주도한 인물이었다”며 ‘김재규 민주주의자론’에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김재규가 권력욕이나 복수심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관점은 사건의 역사적 본질을 가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 이사장은 김재규가 권위주의 정권의 일원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다는 점을 중요하게 평가했다. 실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야당과 민주 진영 인사들에 온건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다. 서 이사장은 “극단적인 권력에서 좀 더 민주적인 권력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온건파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며 “김재규의 결단은 독재 정권과 민중의 극한 대립으로 인한 끔찍한 유혈 사태를 막았고 한국 사회가 좀 더 유연하게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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