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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찬성" 날조된 민의, 국책사업을 화약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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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찬성" 날조된 민의, 국책사업을 화약고로

입력
2014.10.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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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추진 급급한 정부·지자체 주민에 정보 제대로 안 알리고

이장·면장들 동원 여론조작, 무조건 밀어붙이기 하다 갈등 폭발

거창군이 법조타운 유치 근거로 내세운 군민 3만여명의 찬성 서명부. 그러나 서명부 곳곳에서 동일인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대리서명이 발견됐다.
거창군이 법조타운 유치 근거로 내세운 군민 3만여명의 찬성 서명부. 그러나 서명부 곳곳에서 동일인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대리서명이 발견됐다.

주민 합의 없이 시작된 국책사업으로 지역사회가 분열되는 갈등 사례가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사업 추진에 급급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날조된 민의’를 내세워 사업을 유치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 안 그래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민간 갈등을 더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조타운 유치를 놓고 찬반으로 여론이 갈려 홍역을 치르고 있는 인구 6만명의 경남 거창군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쪽은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이유로 법조타운 유치를 찬성하지만, 다른 편은 전체 면적의 4분의 3이 교도소인데 법조타운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했다며 반대하고 있다. 올해 6월 거창YMCA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만 19세 이상 거창군민 5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5.3%가 반대한다고 답했고 찬성은 35.1%였다.

이렇게 민감한 문제인데도 거창군은 법조타운 유치 확정 때까지 군민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유치 시설을 제대로 알려주는 설명회나 공청회를 한 번도 열지 않고 ‘묻지마’ 사업 추진을 계속 했다. 이런 가운데 거창군이 민심과 동떨어진 주민 3만여명의 찬성 서명부를 만들어 사업을 유치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고 있다. 거창군 고제면 주민 한모(59)씨는 “거창교도소나 법조타운 얘기는 듣지도 못했는데 서명부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강원 삼척시의 원자력발전소 유치 과정에서도 조작 의혹이 짙은 서명부가 민심으로 둔갑했다. 2012년 5월 삼척시는 ‘주민 5만3,889명 가운데 96.9%가 원전 유치에 찬성한다’는 서명부를 청와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제출했다. 서명부는 같은 해 9월 정부가 신규 원전건설 예정지를 정할 때 주민 수용의사의 가장 큰 근거로 판단됐다. 그러나 최근 정의당 김제남 의원이 공개한 주민 서명부에는 동일인이 일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서명이 다수 발견되는 등 날조 정황이 드러났다. 급기야 원전백지화 범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는 22일 서명을 주도한 김대수 전 삼척시장과 관련 공무원, 원전 유치단체 관계자들을 공문서 훼손 은닉 파기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지방 특성상 읍ㆍ면 단위 이하 주민의견 수렴에는 각 마을 이장, 면장 등의 역할이 막대하다. 거창군 남상면 주민 유모(61)씨는 “행정편의상 시골에서는 마을 이장이 주민들 도장을 보관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주민들 대리서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이장, 면장이 여론 조작에 동원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거창군은 2011년 2월 23일과 28일 두 차례 관할 읍ㆍ면에 “법조타운 유치 서명운동이 진행 중이니 협조해 달라”면서 읍ㆍ면별 서명 추진 실적을 첨부한 공문을 보냈다. 이장, 면장은 서명률을 높이라는 압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거창군 웅양면 이장 출신 A씨는 “당시 면이 작성해준 주민들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도장을 직접 찍었다”고 털어 놓았다.

이렇게 왜곡된 주민 의견을 바탕으로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더 큰 갈등과 비용만 초래한 경우는 이전에도 많았다. 여론 수렴을 무시한 채 2008년 첫 삽을 뜬 밀양 송전탑공사는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11차례나 중단됐고 주민 2명이 분신과 음독으로 목숨을 잃었다.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지난해까지 해군기지 반대 투쟁으로 체포ㆍ연행된 주민이 660명을 넘어섰고 구속자는 38명에 달한다. 거창에서는 가족 사이에서도 의견이 다르면 말도 섞지 않는 등 주민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삼척에서도 이달 9일 실시한 주민투표 결과 원전 반대가 8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반대 주민들은 “시민이 결정한 반핵의 목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나섰고 찬성 주민들은 “주민투표 과정에서 위법이 있었다”며 “원전 예정구역 지정을 취소한다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전개할 것”이라고 맞서는 등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갈등관리능력 등을 토대로 발표한 사회갈등지수에 따르면 2010년 기준 한국의 지수는 0.72로, 터키에 이어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갈등이 심각한 국가였다.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연간 82조~246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사회갈등지수가 OECD 평균수준(0.44)으로만 개선되더라도 GDP가 7~21% 증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재진기자 blanc@hk.co.kr

삼척=박은성기자 esp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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