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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인문계 인구론

입력
2014.10.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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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文史)를 제대로 익히면 무예(武藝) 못지않은 힘이 된다. 당(唐)나라의 정사인 구당서(舊唐書) ‘두위(竇威) 열전’에는 두위를 ‘책 바보’라는 뜻의 ‘서치(書癡)’라고 불렀다는 말이 나온다. 두위는 수(隋)ㆍ당(唐)이 명멸하던 혼란기에 살았는데, 두씨 일족은 모두 무용(武勇)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형제들도 모두 무예를 숭상했는데 두예만 문사(文史)에 깊이 빠져서 책만 보자 형제들이 ‘서치(書癡)’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위는 역사서를 깊게 파면서 세상 이치를 깨달았다. 형제들이 군공(軍功)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 두위는 한직(閑職)을 전전했는데, 중원을 통일한 수(隋) 문제(文帝)의 아들인 촉왕(蜀王) 양수(楊秀)의 발탁으로 기실(記室)이 되었다. 그러나 양수가 불법을 자행하자 병을 칭탁하고 물러났는데, 훗날 양수가 폐위될 때 많은 관리들이 처벌당했지만 그가 무사했던 것도 역사서에 밝았기 때문이다. 수 양제 대업(大業) 4년(608)에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어서 간언하다가 좌천과 파면을 거듭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 후 당 고조 이연(李淵)을 만나면서 두위의 학문이 꽃을 피우는데, 천하대란 때 많은 전례(典禮)가 소실되었지만 궁중 고사에 밝았던 ‘책 바보’ 두위 덕분에 당나라는 각종 제도와 문물을 수립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이덕무(李德懋)의 글 중에 ‘간서치전(看書痴傳)’이라는 것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독서마니아’ 또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인데,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도 알지 못했다는 목멱산(木覓山ㆍ서울 남산) 아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사람은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지 않아서 사람들이 ‘간서치’라고 지목해도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이덕무는 ‘간서치전’을 쓰면서 “그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 자신의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이덕무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서자(庶子)여서 세상에 쓰이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가 재위 1년(1777)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 즉 ‘서자들을 벼슬길에 진출시키는 법’을 반포하고 재위 3년(1779) 이덕무ㆍ유득공ㆍ박제가ㆍ서리수의 네 서자(庶子)를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네 명의 검서관은 이후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 후기 지식사회를 주도했는데, 이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인 중상주의(重商主義) 실학이다.

최근 기업들이 인문계 졸업생들을 외면하면서 ‘인문대 졸업생 90%는 논다’는 ‘인구론’이란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거꾸로 미국이나 유럽의 MBA 과정 등은 역사학 등 인문학을 정규과목으로 넣는 추세라고 한다. 인문계를 홀대하는 사회는 문제가 있지만 그 홀대의 원인을 사회구조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 보통 인문학을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하는데, 문사(文史)는 우리 선조들도 사용하던 용어지만 철학(哲學)은 아니었다. 철학이란 용어는 19세기 일본의 니시 아마네(西周ㆍ1829~1897)가 필로소피(philosophy)를 희철학(希哲學ㆍ그리스철학)이라고 번역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니시 아마네는 에도(江戶) 시대였던 1841년 여러 번(藩)의 무사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번교(藩校)의 양로관(養老館)에서 난학(蘭學)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다. 난학이란 에도 시대 네덜란드어(語) 서적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던 것을 뜻하는데, 1862년에는 막부의 명으로 츠다 마미치(津田眞道) 등과 네덜란드로 유학 갔는데, 이때 겉으로는 박애주의를 표방하는 비밀조직인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기도 했다. 귀국 후 행적은 박애와는 거리가 멀어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왕정복고 후에는 도쿠가와 집안에서 설립한 소진병학교(沼津兵學校)의 교장으로 취임해 병사를 길렀다. 또한 메이지 정부에도 출사해 이른바 군인칙유(軍人勅諭)와 군인훈계(軍人訓戒) 작성에도 관여하는 등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가는데 사상적으로 한몫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왕 메이지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과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 지식인들의 갈지(之)자 행보는 니시 아마네에게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그가 예술(藝術), 이성(理性), 과학(科學), 기술(技術) 같은 용어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용어들은 동양사회에서도 쓰던 말들인데 일본인들이 이런 전통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인식했던 것뿐이다. 그렇게 뿌리가 없기에 여러 한자 용어를 만들고 나서는 1874년에는 명육잡지(明六雜誌) 창간호에 ‘서양문자로 국어(일본어)를 쓰는 이론(洋字ヲ以テ國語ヲ書スルノ論)’을 발표해 가나와 한자를 폐지하고 서양 글자를 쓰자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부평초 학자인데, 이런 부평초가 만든 인문학에서 지금의 한국 인문학은 얼마나 벗어났는지, 사검서의 중상주의 실학 같은 콘텐츠를 갖고 있는지를 반문하고 맹성(猛省)할 때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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