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색의 향기] 잉여를 알아주는 눈

입력
2014.10.23 20:00
0 0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그 삶이 참으로팍팍하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잉여라는 말이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비교적 태평과 풍요를 누리던 18세기 조선에도 잉여 인간이 넘쳐났던 모양이다. 김약련(金若鍊)이라는 문인의 벗 중에 자신의 집 이름을 무용재(無用齋)라 한 이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하여 세상에 쓰이고자 하였지만 벼슬에 오르지 못하여 배움이 무용하게 되었고, 먹고살고자 농사를 지었지만 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농사가 무용한 짓이 되어 버렸으며,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두려고 하였지만 자식 하나 낳지 못하였으니 결혼조차 무용한 일이 되어 버렸다.

김약련은 이렇게 위로하였다. 공부를 하여 사람의 도리를 알게 되고 무식하여 걸어 다니는 고깃덩이라는 놀림을 면하게 되었으니 공부가 무용한 것만은 아니요, 농사를 지어 도둑이나 강도가 되지 않고 굶어죽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으니 농사가 그나마 유용한 일이라 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을 두고는 아내가 옷과 밥을 마련하여 자신을 보필하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문하였다.

그리고 김약연은 “입은 말을 하는 데 쓰고 귀는 듣는 데 쓰며 눈은 보는 데 쓰고 손은 잡는 데 쓰며 발은 가는 데 쓰니, 이 모두가 쓰임이 있는 것이다. 하필 말이 민첩하고 조그만 소리를 들으며 가려진 것을 보고 무거운 것을 들며 걸음이 빨라야만 쓰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작은 쓰임이라도 그 가치가 있다는 말로 위로하였다.

비슷한 시기 자신을 잉여인간으로 여겨 호를 잉여옹(剩餘翁)이라 한 사람이 있었다. 시 짓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무도 그 쓰임을 알아주지 않으니 세상에서 무용한 존재라 하여 이렇게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이 시기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인 위백규(魏伯珪)는 이렇게 말하였다. “잉여라고 하는 말은 소용이 없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베는 잉여가 없으면 옷을 지을 수 없고 재목은 잉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게다가 솜씨 좋은 부인이나 기술자가 잉여를 활용하여 쓰임새 있게 만들어 그 솜씨가 더욱 드러나게 하지 않던가!” 옷을 지을 때도 온전한 베뿐만 아니라 남은 자투리가 있어야 하며 집을 지을 때도 큰 재목뿐만 아니라 자투리 목재가 있어야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렇듯 잉여도 작지만 가치가 있다.

그런데 잉여는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위백규는 “잉여가 되는 것은 잉여가 그 자체로 무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쓸 줄 모르는 자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세상에 가치가 없는 잉여는 없다. 다만 그 잉여를 알아보고 적절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 뿐이다.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문단의 우이를 잡았던 이용휴(李用休)는 “사람들은 유용한 것이 쓰임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무용한 것이 쓰임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유용한 것의 쓰임은 귀나 눈에 드러나지만 무용한 것의 쓰임은 빈 것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잉여가 넘쳐날수록 숨겨져 있는 빈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장관은 부서진 기왓조각에 있다고 하였다. 부서진 기왓조각은 버려진 물건이지만 담장의 치장거리로 삼으면 아름다운 문양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와 역으로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수난을 당한다. 이 무렵 조선의 귀족들은 다투어 중국에서 수선화를 비싼 값에 들여왔다. 그런데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 가보니 수선화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수선화를 말이나 소 먹이로 삼았다. 심지어 보리밭에 잡초처럼 자꾸 돋아난다 하여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선화가 이런 수난을 당하는 것이라 하였다. 거리를 서성이는 잉여인간 중에 제주도의 수선화가 없겠는가?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