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지우는 뇌의 활동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민첩하고 정교하다. 수치와 고통에 불필요한 시간을 쏟지 않게 하기 위한 뇌의 배려는, 종종 뻔뻔하리만치 왕성해 우리의 기억을 타인의 그것과 괴리시키기도 한다. 그쯤 되면 이것이 배려인지 응징인지 헷갈리게 된다. 어차피 우리의 선택지는 안하무인과 수치를 앓는 자, 둘 중 하나뿐인 것이다.
상현은 버려진 주차장을 관리하는 마흔 줄의 장애인 여성이다. 그에게도 복숭아 뺨 같은 시절이 있었으나 이젠 다 옛말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린 그날 이후 상현의 기억은 산산이 부서졌다. 사고 직후 완전히 사라졌던 기억은 불완전하게나마 돌아왔지만, 현재 기억력은 오늘 본 사람을 내일 잊지 않기 위해 종이에 얼굴을 그려놔야 할 수준이다.
오전에만 잠깐 햇살이 들어오는 주차장에서 자신만의 티타임을 즐기며 불만 없이 살던 상현에게 우연히 중고등학교 동창 율희가 찾아오면서, 딱지 덮인 상현의 기억은 조금씩 벌어져 진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에휴, 어떻게 이 지경이 됐니.” 자신을 보고 요란스레 반가워하는 율희가 상현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율희가 무심코 뱉는 말들은 단단하게 봉합돼 있던 무언가를 깨뜨린다. “얼굴 쭈글쭈글한 거 봐라. 아무리 니가 이런 처지라도 그렇게 살지 마.” “너희 가족들은… 이런, 미안. 의절 당했다고 했지.” 상현은 예전에도 분명히 저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율희가 건넨 고가의 선물을 거절한 다음부터 상현의 팬 블로그에는 일련의 악성루머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상현의 그림을 책으로 펴낸 큐레이터가 알려준 추문의 내용은, 상현이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유부남 미술 교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 그 소문 때문에 상현은 따돌림을 당하고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됐다는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혼란스러운 상현에게 어느 날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들이 찾아온다. 네 명 중 상현이 기억하는 얼굴은 하나도 없지만, 그들이 떠벌리는 아름다운 추억에 상현의 머릿속에 앉은 두터운 피딱지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벗겨진다. 상현과 같은 미술반이었다는 지영은 우리가 함께 사생대회에 나갔다며 웃지만, 상현은 지영이 자신의 옷과 그림에 붓 빤 물을 엎어버린 것을 기억해낸다. 미영과 예숙은 상현이 쌀집 앞에서 넘어진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지만, 상현은 자신의 등을 떠밀던 예숙의 작은 손을 또렷이 떠올린다. 그리고 늘 자신을 둘러싸고 들려오던 말 “더러운 년”.
율희가 퍼뜨린 거짓 소문, 그에 동조한 아이들, 고소를 당하고 학교를 그만둔 선생님, 손녀의 자살 시도로 심장마비를 일으킨 할머니. 상현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부정적인 감정들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내 머리에 쉴 새 없이 내리 꽂혔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감정과 기억의 파편을 맞은 머리 속이 팽팽하게 부어올라 곧 터질 것처럼 아팠다.”
상현은 이전에 살던 집을 찾아 현관문에 쪽지 한 장을 꽂아두고 온다.“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주차장으로 돌아와 밥을 씹어 삼키며 상현은 한 편으로 안도한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이 명백히 지나버렸다는 것에, 기세 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라는 것에.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정소현 작가를 “기억의 혼란과 망각을 변주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작가는 무의식의 심연을 찢고 나오는 진실이 윤색된 기억과 얼마나 다른지를 늘 진지하게 이야기해 왔다”며 “기억은 투명하지 않다는 것, 오인될 수 있다는 것, 언제든 폭력적인 진실과 조우할 수 있다는 것을 가족사 안에서 몰입감 있게 그려냈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1975년 서울 출생
홍익대 예술학과와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양장 제본서 전기’가 당선돼 등단
2010년 제1회 젊은작가상과 2012년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 2013년 제20회 김준성문학상 수상. 소설집으로 ‘실수하는 인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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