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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니 그립다

입력
2014.10.2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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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멀거나 거의 다 사라져 사실상 닿을 수 없단 점에서 진실-빛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움을 추동하는 동력은 이런 부재다. 그 연료는 영원히 바닥나지도 않는다.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빛을 향한 그리움(Nostalgia for the Light)’(칠레ㆍ2010)에서 전혀 다른 조건에 놓인 두 집단의 혼연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없이 멀거나 거의 다 사라져 사실상 닿을 수 없단 점에서 진실-빛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움을 추동하는 동력은 이런 부재다. 그 연료는 영원히 바닥나지도 않는다.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빛을 향한 그리움(Nostalgia for the Light)’(칠레ㆍ2010)에서 전혀 다른 조건에 놓인 두 집단의 혼연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동경은 끝나지 않는다. 부재가 대상이어서다. 누구도 전(全)시공에 존재하진 못한다. 모든 사전은 딴 사전이 보완한다. 확정 따윈 세속에 없다. 진실을 향한 도정은 차이의 점철이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탄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책을 읽다 만 적이 있다. (…) 상의 권위에 이끌려 며칠 전 다시 그의 작품을 꺼내 읽다가 뜬금없게도, 거기서 기억 너머의 그리움을 엿보게 됐고, 그리움이란 게 사뭇 다른 두 감정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는 어줍잖은 생각을 하게도 됐다. 지금은 없는, 한 때 내 것이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하나이고, 한 순간도 내 것인 적 없었던, 그래서 뭔진 몰라도 어딘가 있을 막연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하나라는 생각이다. 전자가 결핍과 상실의 아픔으로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라면, 후자는 동경이나 기대, 기약 없는 희망 같은 감정과 더불어 부푸는 그리움이다. 전자는 기억에 이끌리는 감정이고, 후자는 상상력에 연루된 감정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문화 예술의 토양이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듯도 하다. 저 두 종류의 그리움이 만나 하나로 포개지는 거대한 순간을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의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빛을 향한 그리움(Nostalgia for the Light)’에서 사무치게 경험한 적이 있다. (…) 하늘 너머 더 너머 빛 속 어딘가에 있을 해답의 단서를 찾는 과학자들의 그리움이 까마득한 과거를 향한 미지의 상상력 위의 그리움이라면, 여인들이 파헤치는 것은 엎어지면 코 닿을 자리의 진실에 대한 기억 위의 그리움이다. 영화는 두 그리움이 우주의 시간과 아타카마의 공간 위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사막의 바람처럼 건조하게 보여준다. (…)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세대다. 저 국민교육헌장이 부여한 거룩한 사명까진 모르겠으나, 헌장이 지시하고 국가가 암기하게 한 ‘우리의 나아갈 바’란 게 저 기억과 상상력의 장애물이란 건 안다. 내용은 두더라도 형식이 그렇다는 의미다. ‘이제 그만하라’며 막는 것도, ‘이게 전부’라며 시선을 제약하는 것도, 저 길의 장애물이다. 여러 종의 교과서 가운데 끼어 든 미심쩍은 한두 종의 교과서보다 단일의 국정교과서가 그래서 더 나쁘다. 그건 이념과 사상, 한 시대 역사의식의 문제 이전에 인간과 반인간, 문화와 반문화의 문제다. 영화 속 두 그리움이 좇는 ‘빛’은 과학의 진실처럼 영원한 가설일지 모르고, 의혹 위에 놓일 새로운 의혹일수도 있다. 또 모디아노도 누구도 우리에게 궁극의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상을 주고 받는 까닭은 ‘빛’못지 않게 ‘그리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빛을 향한 그리움(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애매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각과 해석과 입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완벽하지 못한 애매함이 아름다울 수 있는 곳, 그곳이 인문학이다. (…) 애매한 인간 혹은 인간의 애매함을 다룬다는 말은 다양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 인문학을 공부하자며 대통령부터 기업 사장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아마도 애매함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 보인다. 노동당 부대표의 카카오톡을 검찰이 사찰하고,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 이벤트를 벌이며, 남자가 치어리더에게 술을 따르라 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댓글들이 줄을 잇는다. (…) 혐오문화의 전면화가 드러내는 한 진실은 이 사회에서는 오직 애매하지 않은 인간만이 혐오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사랑한다고, 북한을 싫어한다고, 법질서를 존중한다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부정적이지 않다고, 이성애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회가, 경찰이, 기업이, 언론이, 대학이, 인터넷이 이러한 고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청하며, 우리는 ‘죄지은 게 없이 당당하다면’ 그 요구에 응해야 한다. 너의 정체, 너의 정답을 밝혀라! 너의 애매한 태도는 네가 부끄러운 게 있음을 말해준다! (…) 애매함은 삶의 본질이며, 인간의 본질이며, 세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인간은 답이 없으며, 끝까지 답이 없는 세계에서 살다 죽는다. 그런 인간에게 확실한 정답과 정체를 강요하면서 이를 혐오와 폭력으로 연결시키는 사회라면 그곳은 분명 인간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사회가 아니다.”

-애매함에 관하여(10월 18일자 한겨레 ‘크리틱’ㆍ문강형준 문화평론가) ☞ 전문 보기

정작 통제가 긴요할 땐 무능하지만 감당 못할 규제엔 무모한 정부. 넉넉해지긴커녕 옹색해진 자유를 견딜 이는 이제 드물다. 자유로워진 망명 덕이다. 마음속 말고도 도피처는 많다.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과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겉으로 둘 사이엔 아무 연관이 없다. 한데 일맥상통하는 게 있다. 우리나라 규제정책의 난맥상을 한눈에 보여준다는 점이다. 먼저 단통법. 이 법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통신요금 인하’ 실현을 위해 마련됐다. (…) 방법은 스마트폰 가격을 좌우하던 보조금 차별을 없애는 것. (…) 가격은 경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지 법으로 정하는 게 아닌데도 정부는 대통령 한 말씀에 냉큼 가격에 손을 댔다. 통신비를 낮추려면 요금 규제를 풀어 경쟁을 하도록 하는 게 나았을 거다. ‘시장가격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전근대적 발상에서 비롯된 정부의 헛발질로 시장은 혼란스럽다. 이번엔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 안전규제는 해방구 수준으로 허술하다. (…) 안전은 이번 정부의 슬로건이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명하며, 간판ㆍ봉투ㆍ명함 제작 등 소소한 비용으로만 100억여원을 썼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를 필두로 전대미문의 안전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 ‘위험’은 보이지 않고 몰라서 위험한 거다. (…) 이번 사고는 환풍구에 올라간 시민들로 인해 일어났다는 점에서 ‘시민정신’이 도마에 올랐다. (…) 한데 시민정신도 배워야 생긴다. 거리의 철재 덮개 밑이 18m나 된다는 걸 저절로 아는 사람은 없다. 배에서 사고가 나면 일단 선실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모른다. (…) 가격ㆍ산업에 대한 경제규제는 자칫하면 시장 실패를 부른다.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제규제는 촘촘하고 화끈하게 지르고 본다. 반면 대중의 안전과 환경을 위협하는 위해 요인을 제거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적 규제는 촘촘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대중을 통제하고 시민 안전교육을 집요하게 해야 한다. 한데 우리나라 규제정책은 생색나고 보이는 데만 집중한다.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두 사안에서 우리는 헛발질 규제를 일삼는 정부의 민낯을 본다. 나라가 편하려면 정부가 기초실력부터 키워야 할 것 같다.”

-혼란을 부추기는 정부의 ‘실력’(중앙일보 ‘양선희의 시시각각’ㆍ논설위원) ☞ 전문 보기

“사회학적으로 망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부로 향하는 ‘지리적 망명’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삶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거나 아예 이민을 가는 것이 대표 사례다. (…) 다른 하나는 내부로 향하는 ‘내면적 망명’이다. 외부와 단절한 채 삶의 내부에 칩거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자아정체성을 방어하고 지켜내려는 게 이 망명의 목표다. (…)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꿈을 꾼다.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눈을 뜬다.”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말이다. 지리적 망명은 꿈을 꾸게 하고, 내면적 망명은 눈을 뜨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실이 곤궁하다면 망명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망명은 인간에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외부로 향하든 내부로 향하든 망명을 통해 새로운 자유를 얻으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다. (…) 누군가 나의 메신저를 동의 없이 들여다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하는 ‘원형감옥(panopticon)’이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 자신이 사이버 감옥의 수인(囚人)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새로운 자유의 공간으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망명은 분명 자유를 선물한다. 하지만 이 망명이 정부 통제에 따른 결과라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생활과 통신 비밀을 침해 받지 않을 권리는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이다. 국가 안보를 위해 불가피하더라도 검찰이든 법원이든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해야 한다.”

-원형감옥과 사이버 망명(10월 14일자 한국일보 ‘김호기의 원근법’ㆍ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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