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 "성공할 때까지 참아라"

입력
2014.10.22 18:58
0 0

성장주의에 묻힌 아이돌 육성 시스템

한계 분명하고 시대흐름도 맞지 않아

보고 듣고 하는 사람 모두가 즐거워야

지난해 1월 원더걸스의 선예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했다. 30대를 훌쩍 넘어야 결혼하거나 아니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한국의 풍토에서 만 스물네 살의, 그것도 가수로서 큰 재능을 발휘하는 여성이 결혼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선 놀라웠다. 그러면서 다른 아이돌 가수도 과연 선예처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 궁금했다(선예와 원더걸스 및 기획사의 구체적 계약내용 등 이면의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올해 9월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나인 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을 보면 한국의 아이돌 가수가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9인조 그룹 나인 뮤지스가 2010년 데뷔 이후 보낸 1년의 시간을 기록한 이 다큐는 기운이 빠져도, 지쳐도, 아파도, 슬퍼도 오직 연습에만 몰두해야 하는 아이돌 멤버들의 고단한 생활을 담고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 멤버들을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안무가는 “아파서 쉬기는 뭘 아파서 쉬어” “억울하면 떠라” “열심히 할 자신 없으면 그만 두라”고 몰아세운다. 기획사 대표는 항상 굳은 표정으로 멤버들을 바라보는데 그 역시 멤버들만큼이나 긴장하고 불안한 게 틀림없다. 나인 뮤지스를 탈퇴한 한 멤버의 말은 아이돌 그룹과 그에 기반한 케이팝의 쓸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데뷔 전에는 인간다움, 인간성, 정 이런 게 공존을 했어. 그런데 지금은 없어.”

인간다움, 인간성, 정이 없는 그곳에는 감당하기 힘든 경쟁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처절함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획사와 가수 혹은 가수지망생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살벌하게 사는지 보여준다. 이것을 보고 그들이 치열하게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겉만 살핀 어설픈 관찰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젊은 가수들의 무대 밖 사투는 이제껏 가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인기 그룹 엑소의 중국인 멤버 크리스와 루한이 소속사를 상대로 전속계약효력부존재확인 소송을 내며 독자행보를 시작한 것이나 제국의아이들의 문준영이 소속사 대표를 비판하고 사과했다가 결국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이돌 그룹과 케이팝 산업의 위태로운 현실을 보여준다.

케이팝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여전히 낙관하는 이도 있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그것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보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외연을 넓히지 못하고 내수시장에서도 스타를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거나 심지어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한 팀을 키우기 위해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을 들인 기획사는 이런 시장 상황에서 불안을 느낀다. 가수와 자금이 풍부한 정상급 기획사는 사정이 낫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당수의 기획사는 소속 가수들을 마구잡이로 행사에 동원하고, 어떻게든 시선을 끌어보겠다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선정적인 춤까지 추게 한다. 기껏 20대 초반의 멤버들이 그런 춤을 못 추겠다고 거부하기 보다 그 춤에 큰 의미가 있는 양 옹호하는 태도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대변한다.

한국의 아이돌 시스템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성장지상주의 국가전략과 많이 닮았다. 가혹한 훈련, 규율과 통제, 인내와 희생 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강압적 사회분위기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도 보듯, 그 같은 국가전략과 사회분위기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라도 아이돌 시스템과 케이팝 전략에 변화가 필요하다. 보는 사람, 듣는 사람, 하는 사람 모두 즐거워야 할 음악이 지금처럼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에 기반한다면 한계가 뻔하다. 그런 억압적인 시스템에서는 기획사와 멤버간 갈등이 재연될 수밖에 없고 창의적인 음악이 나오기 어렵다. 일부 전문가가 케이팝을 공장식 문화상품이라고 꼬집는 것은 그런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한국의 대중음악가들은 과거의 시스템에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큐멘터리 ‘나인 뮤지스…’에 나오는 “성공할 때까지는 참아라”는 식의 말도 버릴 때가 됐다.

박광희 부국장 겸 문화부장 khpar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