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 테마는 당연히 단풍이라고 생각하지만, 경남 합천의 황매산 억새를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곳 억새가 남달리 크고 풍성해서가 아니다. 바로 가을날 오후의 햇살에 딱 어울리는 지형과 바람 때문이다.
황매산 가는 길은 아직도 오지의 느낌 그대로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생초IC에서 황매산 가는 길은 꼬불꼬불 불편한 만큼이나 궁벽한 산골풍경이 정겹다. 골짜기마다 손바닥만한 논배미 사이로 난 지방도에서 나락을 말리는 아낙의 모습이 고달프고도 한갓지다. 산청군 차황면에서 합천군 대병면을 잇는 황매산터널을 지나면 누렇다 못해 붉은 기운마저 감도는 다랑논 아래로 합천호 푸른 물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도로는 합천호를 끼고 가다가 다시 가회면으로 넘어가는 산길을 오른다. 계단식 논이라고는 하지만 합천호에서 산자락까지는 경사가 완만해 들이 제법 너르고 마을도 품이 넉넉해 보인다. 고개마루에서 60번 지방도로 우회전해 조금(약 2.3km)만 가면 황매산 군립공원이다. 포장도로는 해발 750m 지점 황매산오토캠핑장에서 끝난다.
산 이름만 보면 누런 매실이 주렁주렁 열려 있어야 할 것 같지만, 황매산은 매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대신 오토캠핑장 주차장에서부터 하얗게 꽃대를 피어 올린 억새가 넘실댄다. 1980년대 초 목장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불태운 자리에 생명력이 강한 철쭉과 억새가 가장 먼저 자라 군락을 이뤘다. 황매산이 봄 철쭉과 가을 억새의 명소가 된 내력이다.
등산은 이곳부터다. 말이 등산이지 해발 1,000m 가까운 능선까지 완만하게 길이 잘 닦여 있어 산책하듯 가볍게 오를 수 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촬영세트가 폐허처럼 스러진 능선 정상에 서면 오른쪽으로 제법 웅장한 바위산이 버티고 섰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가 부담스럽지만 나무데크로 만든 등산로가 정상부근까지 이어져 있다. 데크는 산청군에서 만들었다. 황매산은 산청과 합천의 경계로 두 군이 관광객 유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아무렴 어떤가? 여행객 입장에선 누가 만들었든 고마울 따름이다. 10여분 나무계단을 올라 가뿐 한숨 돌려 아래를 내려다 본다. 오른편으론 산청 차황면의 다랑논이 산줄기 사이사이에 누런 풍경화를 그리고, 겹겹이 희미해지는 능선 끝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왼편으론 황매산 끝자락 모산재의 화강암 바위 능선이 당당하고 하얀 자태를 뽐낸다. 어디를 둘러보나 사방이 툭 트였다.
굳이 아껴 둔 것은 아니지만, 하산 길에 보는 억새가 진짜다. 아니 정확히는 태양이 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 때 역광으로 보는 억새가 진짜다. 황매산 억새군락은 이 조건에 꼭 맞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빛을 등지고 보는 억새의 솜털이 매끈한 모습이라면 역광으로 보는 억새는 목화처럼 복슬복슬하다. 억새 꽃(실제는 꽃이 아니라 이삭, 즉 씨앗에 붙은 솜털이다) 속살로 파고든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하얗다. 산등성이로 부는 바람은 끝없이 머리채를 흔들고, 억새군락은 순식간에 소금밭보다 하얀 물결이 된다. 때로는 일렁이는 불이고, 때로는 휘몰아 치는 파도다. 빛을 잃은 억새는 스스로 배경이 되어 마지막까지 햇살을 머금은 억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낮은 골짜기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우면 등성마루의 억새는 남은 햇빛을 모조리 흡수한 듯 하얀 불꽃처럼 피어 오른다. 어느 가을날 오후 빛과 바람의 선율에 몸을 맡긴 황홀한 억새 춤으로 한바탕 잘 놀았다. 그러니까 황매산 산행은 오후에 시작해 정상에서 합천과 산청의 골짜기마다 쌓이는 가을 풍경을 감상한 후, 내려오는 길에 억새군락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게 좋겠다.
●황매산의 기운 그대로 받은 영암사지
황매산까지 왔다면 영암사지(靈岩寺址)는 꼭 봐야 한다. 이미 1000년 전 사라진 절터에 불과하지만 보물을 3점이나 보유하고 있다. 쌍사자석등(보물 제 353호)은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6권의 표지모델이다. “국보급인데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져 보수하는 바람에 보물급으로 떨어졌다”는 게 합천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3개의 쌍사자석등 중 속리산 법주사와 광양 중흥사지의 석등은 국보로 지정됐으니 안타까울 만도 하다. 유홍준은 석등을 받히고 있는 두 사자 사이의 공허공간을 미적으로 높게 평가했다. 산쪽에서 보면 그 공간 사이로 삼층석탑이 보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황매산 모산재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미적 감각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한눈에 달라 보이는 구조물은 오히려 석등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얕게 계단을 판 바위가 무지개처럼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외에도 축대 중간중간에 튀어나온 쐐기돌이며, 금당의 아기자기하고 생동감 넘치는 돋을새김이 신라 석공들의 기술과 미학을 한껏 뽐내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야 아는 만큼 보이겠지만, 모산재가 내뿜는 기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옛날 합천 가회면과 산청 차황면을 잇는 길목이어서 ‘재’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황매산의 끝 봉우리다. 합천군에서는 영암사지에서 시작하는 등산코스를 ‘기적길’이라 이름 붙였는데 걸을수록 기운이 쌓인다는 의미겠다. 안내책자도 황매산 모산재를 ‘억센 사내의 힘줄 같은 암봉으로 에너지가 크게 넘치는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영암사지엔 폐사지의 쓸쓸함보다는 좋은 기운에서 풍기는 평온함이 느껴진다. 모든 잡념 버리고 한참을 머물러도 좋은 곳이다.
합천=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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