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원제(元帝ㆍ재위 서기전 43~33) 때 활동했던 대덕(戴德)이라는 인물이 있다. ‘대덕이 지은 예(禮)에 관한 책’이란 뜻의 대대례(大戴禮)를 썼다. 그 중 ‘보부(保傅)’편이 있는데, 보부란 고대 태자에게 학문과 예의를 가르치던 관직을 뜻한다. 여기에 태자의 거처에 “착한 일을 하도록 권하는 깃발이 있고, 잘못을 써 놓은 나무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착한 일을 하라고 권하는 깃발이 ‘진선정(進善旌)’이고, 정치의 잘못을 써 놓은 나무가 ‘비방목(誹謗木)’이다. 태자의 거처에 착한 일을 권하는 깃발과 잘못을 비판하는 나무를 세워놓고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선정과 비방목은 원래 태자가 아니라 군주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전국(戰國)시대 말기 각 나라에서는 이른바 지식인 쟁탈전이 벌어졌다.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어서 지식인과 재주 있는 인사들을 다투어 영입했는데, 세상에서는 이들을 사군자(四君子)라고 불렀다. 이들 산하에는 수백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빈객들이 몰려들었는데, 진(秦)나라의 승상 여불위(呂不韋)는 국력이 강한 진나라에 이런 빈객들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상객(上客)들을 끌어 모았다. 그래서 무려 3,000명에 달하는 빈객들이 모였는데, 여불위는 이들에게 각자 듣거나 생각하고 있는 바를 써내게 해서 무려 20만 언(言)에 달하는 사례를 모았다. 이를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한 것이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따라서 여씨춘추는 여불위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그 당시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집단지성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군주에게 권하는 말 중에 존망(存亡)과 안위(安危)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고 군주의 안에서 찾으라는 대목에서 ‘비방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堯)임금에게는 잘못을 간하는 북이 있었고, 순(舜)임금에게는 비방목이 있었고, 탕(湯)임금에게는 임금의 잘못을 말해주는 벼슬(司過之士)이 있었고, 무왕(武王)에게는 잘못을 경계해주는 작은 북이 있었다.” (여씨춘추 ‘불구론(不苟論)’)
고대 성군(聖君)들은 모두 임금의 잘못을 알려주는 제도적인 장치를 두었다는 것이다. 요임금이 설치했던 큰 북과 무왕이 설치했던 작은 북이 조선 태종이 만든 신문고(申聞鼓)의 원형이다. 이중에서 임금 자신의 정치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비방목(誹謗木)’이었다. 조선 후기의 개혁 정치가인 백호(白湖) 윤휴(尹?)가 숙종 5년(1679) 비밀리에 올린 차자(箚子)에도 비방목이 나온다. 차자는 일종의 약식 상소문인데, 비밀 차자문은 밀차(密箚)라고 한다. 윤휴는 이 밀차(密箚)에서 “옛날 제왕(帝王)은 다리 근처에 횡목(橫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임금의 허물과 과오와 국가의 득실을 그 나무에 쓰게 해서 임금이 경계하고 수성(修省)하는 자료로 썼는데, 이것이 예전의 이른바 비방목(誹謗木)입니다”(백호전서 ‘소차(疏箚)’ ‘밀차(密箚)’)라고 말했다. 옛날의 제왕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다리 근처에 나무를 세워놓고 임금의 잘못을 직접 쓰게 했다는 것이다. 정치의 잘못을 말해주는 큰 북과 작은 북, 임금의 잘못을 말해주는 벼슬아치 등은 모두 훌륭한 제도지만 익명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임금이 겉으로는 웃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비방목은 글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익명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비방목을 세운 임금에 대해 여씨춘추는 순임금이라는 말했지만 진(晉)나라 혜제(惠帝ㆍ재위 290~306) 때 최표(崔豹)가 쓴 고금주(古今注)에는 요임금이 설치했다고 달리 설명하고 있다. 요임금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구로(衢路ㆍ사거리)에 비방목을 설치해놓고 자신의 정사의 잘못을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방목은 그 후 사라졌다가 한서(漢書) ‘문제(文帝) 본기’에 의하면 문제가 이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중국의 고유한 건축물 중의 하나가 화표(華表)인데, 사각형 기단 위에 둥근 용무늬 등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을 세워놓은 것이다. 지금 북경 천안문 앞에도 대리석으로 만든 화표가 우뚝 서 있다. 궁전이나 능묘(陵墓) 길 양쪽에 세워놓기도 하는데 신도주(神道柱), 석망주(石望柱), 또는 표(表), 표(標), 갈(碣) 등으로도 불린다.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둥이다. 임금의 잘못을 쓰던 비방목이 이정표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니 ‘민심이 천심’을 뜻하는 징표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대 왕조국가에서도 백성들에게 임금의 잘못을 가리지 말고 쓰라고 익명성을 보장하는 ‘비방목’을 설치해 놓았다. 그런데 지금 사이버 공간의 SNS까지 단속한다고 호들갑이니 존망(存亡)과 안위(安危)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라고 말하는 옛 고전과 역사가 무색한 지경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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