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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서정적 문체로 그려 낸 악마적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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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서정적 문체로 그려 낸 악마적 폭력성

입력
2014.10.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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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광주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나’, 장편소설 ‘바벨’이 있다.
1981년 광주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나’, 장편소설 ‘바벨’이 있다.

목소리는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자를 찾아왔다.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8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남자가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왼편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 ‘너는 병실을 떠나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목소리는 이후 그가 어디를 가든 좇아 다니며 그의 내면과 외면을 서술했다.

‘너는 이 대화에 지루함을 느끼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 보고 있다.’

목소리의 의견은 대체로 정확했다.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낡은 펜션을 관리하게 된 남자는 한 수상한 여자를 투숙객으로 맞는다. 여자의 맥락 없는 밝은 표정에서 남자는 자살의 냄새를 맡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방을 내주고 두 사람은 곧 애인 비슷한 관계로 접어든다. 형편 없는 에세이를 쓰고 입만 열면 꿈과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여자가, 남자는 한심하다. 하지만 읍내의 뻣뻣한 창부들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럭저럭 관계를 지속한다.

‘너는 망가진 그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아주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던 장면이었음을 깨달았다.’

목소리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뇌혈관에 문제가 생겨 오른쪽이 완전히 마비된 아버지를 보며 남자는 분통함을 느꼈다. 언젠가 반드시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던 욕망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수백 번 다시 생각해도 기쁘지 않다. 이런 사실조차 모르는 목소리의 정체도 의심스럽다.

전지(全知)의 무의식인줄로만 알았던 목소리는 점점 설득과 참견이 늘어간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어하는 남자를 말릴 때도 있지만, 반대로 은근히 폭력을 조장하기도 한다. 잠자는 여자의 머리맡에 앉아 연필을 집어 든 그에게 목소리가 속삭인다. ‘너는 짝이 맞지 않는 두 개의 눈동자 중 한 개가 유독 맘에 들지 않는다. 연필을 들고 그녀의 눈을 찌를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몇 번 움직였다.’ 남자는 깜짝 놀라 연필을 던지고 방을 나온다.

“나는 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완벽하게 두 몸이 하나로 겹쳐져 지내다 어느 순간 두 개로 나뉘어 각각 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입은 봉해지고 목소리의 입만 남게 되면 어떡하지. 목소리에게 내 몸을 뺏기면 어떡하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여자의 얼굴을 축구공처럼 차버린 날 새벽, 남자는 여자를 좇아 기차역으로 향하고 거기서 목소리의 실체와 마주한다. 어린 시절 남자는 부모,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얻어 맞아 코피를 흘리는 남자에게 여동생은 말 없이 휴지를 건넸고 둘은 기차 연결부에 나란히 서서 바깥을 내다봤다. 풍경을 짓뭉개는 기차의 맹렬한 속도에 파묻혀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동생은 기차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고 남자는 표정의 변화 없이 동생의 등을 떠밀었다. 레일 위에 뭉개진 동생의 모습을 보고도 남자는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동생의 옷에서 뜯겨나간 하얀 천 조각이 주머니에 있을 뿐. 남자는 그것을 입에 넣고 삼킨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이면의 독백’에 대해 “폭력성과 서정성이 절묘하게 조합된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정용준 작가는 초기 작품부터 인간 이면의 폭력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여 왔다”며 “상처의 원인을 유년기의 학대에서 찾는 방식은 다소 아쉽지만 인물에 대한 뛰어난 모사와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 덕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악마적이고 매혹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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