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T 올림픽’으로 불리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전권회의가 어제 부산에서 개막됐다. 정부는 이번 회의를 통해 우리나라가 ICT 인프라 강국을 넘어 ICT 글로벌 정책ㆍ외교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겠다는 전략을 내비치고 있다. 가령 국내 ICT 산업의 중장기적 발전과 해외진출을 위한 포석으로 ‘ICT 융합’과 ‘사물인터넷(loT·Internet of Things) 촉진’을 전권회의 의제로 제안하는 한편 ITU 표준화총국장직에 출사표를 던져 ICT 세계 표준을 주도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최첨단 ICT 인프라를 구축하고 수천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기가급 초고속 유ㆍ무선 네트워크를 활용해 ‘종이 없는 회의’를 구현하며 국내 최대 ICT 전시회를 열어 이번 회의를 글로벌 ICT 대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키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우리의 강점과 경쟁력을 세계에 알리고 국내 산업의 해외진출을 촉진하며 국제기구의 요직에 진출해 국익추구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단순한 홍보와 일국 차원의 국익추구를 넘어 보다 복합적인 외교 전략에 대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핵심은 글로벌 인터넷 관리체계(인터넷 거버넌스)의 새판을 짜기 위한 경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상호 복잡하게 연동돼 움직이는 갈등의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강국, 특히 미중 간 인터넷 패권을 둘러싼 각축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관리 방식을 둘러싼 경쟁, 즉 국가뿐 아니라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협의를 중시하는 멀티스테이크홀더(multistakeholder) 방식과 국가의 권리와 정부간(intergovernmental) 협의체의 권위를 강조하는 국가주의 방식 간 경쟁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미국 내 비영리 민간 법인인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 중심의 멀티스테이크홀더 방식을 지지하는 미국과 미국 주도의 인터넷 질서에 반대해 ICANN의 권한을 ITU와 같은 정부간 기구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국ㆍ러시아 등의 입장이 부딪히고 있는 형국이다.
마침 필자는 바로 지난 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ICANN 회의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부산 ITU 전권회의 직전에 개최된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개막식에 참여한 미 상무부 장관은 ‘혁신’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공익’의 이름으로 ICANN 중심의 멀티스테이크홀더 방식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다른 ‘편협한 방식’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렇다고 ICANN이 미국의 허수아비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 회의는 민간 이해당사자 조직들의 참여와 합의로 진행되면서 진정한 멀티스테이크홀더리즘의 모습을 보여줬고 국가의 역할은 정부자문위원회(GAC)를 통한 자문에 국한됐다.
여하튼 이 갈등은 2000년대 중반 ITU의 주도로 개최된 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WSIS)부터 올해 4월 브라질 인터넷 거버넌스 회의(NETmundial)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인터넷 거버넌스 관련 국제회의에서 논의돼온 핵심 사안이며, 이번 부산 ITU 전권회의도 이런 논의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다보스 포럼과 WSIS+10 등 굵직굵직한 국제회의를 통해 인터넷 거버넌스의 새판을 짜기 위한 논의는 지속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 큰 흐름에 놓인 우리의 외교 전략은 무엇인가? 정부는 지난 2012년 12월 ITU가 개최한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는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더니 브라질 NETmundial에서는 멀티스테이크홀더 방식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어정쩡하게 줄타기 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부상한 멀티스테이크홀더 방식에 대한 정부의 입장도 이번 부산 회의에서 일반 국민과 기업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전시회 등 특별행사를 동시에 개최한다는 아이디어 정도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강국 간 각축의 도가니에서 분별 있는 포지션을 취하고 국내외적으로 멀티스테이크홀더 거버넌스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우리의 국익을 세련되게 추구할 수 있는 중견국 외교 전략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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