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약에 건강기능식품까지, 무조건 처방받아 먹지 않고 쌓아놔
약국서 수거한 것만 상반기 163톤
10명에 9명은 함부로 버려
5살, 9살배기 자매를 키우는 김진영(40)씨는 먹다 남은 약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아이들이 병원놀이 한다고 약들을 꺼내 놓아 집안이 난장판이 됐기 때문이다. 집이 어지러워진 것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약을 먹었을 까봐 겁이 났다. 다행히 약을 먹진 않았지만 먹다 남은 약 가운데 오래된 약을 버리려고 쓰레기봉투를 꺼내 들었다.
“혹시 다시 감기에 걸리면 어쩌지? 감기약은 버리지 말까?” 맞벌이 부부라 갑자기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에 가기 힘든 김씨는 다시 약봉지를 살폈다. 1개월 전 동네의원에서 처방 받은 감기약을 빼니 버릴 약이 좀 줄었다. 처방약만 버리려 했는데 식탁에 있는 건강기능식품들이 눈에 띄었다. “저 약들도 꽤 오래됐는데…” 비타민제, 홍삼제, 스쿠알렌까지 다양한 건강기능식품들의 유통기한을 살펴보니 대부분 유통기간이 지났다. 약국에서 산 약들은 딱히 버릴 것이 없어 김씨는 처방약과 건강기능식품을 모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이제 됐나?” 약을 버린 김씨는 순간 멈칫했다. “약을 그냥 쓰레기봉투에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약국에 갔다 줘야 하나.” 저녁에 같은 반 학부모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던 김씨는 종이봉투에 약을 담아 저녁 약속장소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다행히 약국에는 폐의약품 수거함이 배치돼 있었다. 수거함에 약을 넣고 있는데 약사가 말한다. “폐의약품을 가지고 오는 분들이 별로 없는데 대단하시네요.” 그 말을 들으니 뿌듯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감기에만 걸려도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 약을 먹였고 그것도 모자라 한 번에 많은 약을 처방해 달라고 의사에게 떼를 썼다. 거기에 비타민제에 수면제, 홈쇼핑에서 산 스쿠알렌 등 약에 취해 살고 있었다.
다음날 처가를 들른 김씨는 평소 당뇨병을 앓고 있는 엄마도 만만치 않게 약 관리를 허술하게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엄마, 이 약들이 다 뭐야? 이거 다 먹는 거야.”
“깜박하고 약을 먹지 않아 쌓인 거야.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면 의사 선생에게 꾸중을 들을 것 같아 말을 하지 못해 약을 타오니 쌓일 수밖에 없지 뭐. 버리고 싶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리지도 못하고 나도 답답하다.” 병원에서 받은 약 뿐 인가. 자식들이 몸에 좋다고 사다 놓은 건강기능식품의 태반이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약통에 보물처럼 모셔져 있다. 결국 김씨는 어머니가 먹지 않는 약을 정리해 약국에 갔다.
대한약사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전국의 약국에서 수거한 폐의약품이 163톤에 달했다. 하지만 한국제약협회가 지난 2월 12일부터 3월 4일까지 19세 이상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4 제약산업 국민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2.7%만 ‘약국을 통해 구입한지 오래돼 복용하지 않은 약을 버린다’고 답했다. 163톤이 바로 이 수치인 셈이다. 응답자의 92.2%가 폐의약품을 휴지통, 배수구, 음식물쓰레기와 함께 버리는 현실을 놓고 보면 엄청난 양의 약들이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노윤정 부천신세계 약국 약사는 “고혈압약, 당뇨병약, 혈전용해제, 뇌혈류개선제 등 한 알에 1,000원이 넘는 약이 몇 십 알씩 허다하게 버려진다”며 “약을 제대로 먹는 습관이 건강을 지키는 길인데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다.
먹다 남은 약을 함부로 버리면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의 원인이 된다. 우리 국민의 90% 이상은 폐의약품을 싱크대나 생활쓰레기에 섞어 버려 문제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 보건단체들은 “지방 하천수에서 카페인과 아세트아미노펜 등 사람에게 사용되는 의약품 성분은 물론, 동물의 항생제로 쓰이는 설파티아졸 등이 검출되고 있다”며 “해마다 하천수에서 지속적으로 의약품 성분이 발견되지만 현행 수질기준에는 의약품 성분별 허용기준이 없다”고 했다.
이들 단체는 “2009년부터 보건복지부, 환경부, 대한약사회, 지방자치단체 등이 자발적 합의를 통해 폐의약품 수거에 나서고 있지만 사업주체의 불명확성, 홍보부족 등으로 사업이 활기를 띠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약품이 버려지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도 없어 폐의약품 수거는 물론 폐기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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