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광해군처럼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산 임금을 찾기도 힘들다. 그는 임진왜란이 아니었으면 세자에 책봉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임란 때인 선조 25년(1592년) 세자에 책봉되어 도주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선조를 대신해 분조(分朝ㆍ조정을 둘로 나눈 것)를 이끌고 강원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의병 모집을 했다. 또한 선조 30년(1597년)에 재발한 정유재란 때도 전라도에 내려가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는 등 임란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모두가 광해군을 다음 임금으로 여겼으나, 재위 33년(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김제남의 딸을 계비(繼妃ㆍ인목왕후)로 맞아들인 선조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인목왕후가 선조 39년(1606년)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만 서른 한 살의 세자 대신 강보에 싸인 영창대군에게 자꾸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집권 북인이 둘로 갈라졌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유영경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나뉜 것이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 등은 선조가 재위 41년(1608년) 세상을 떠나자 인목왕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16년 동안 세자 자리에 있었던 만 서른 세 살의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갓난아이를 임금으로 세우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1608년 2월 2일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즉위 초 남다른 국정운영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연립정권을 수립해 거국적으로 전후 복구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즉 자신을 국왕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대북만으로 정국을 운영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였다. 광해군은 즉위년 2월 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서 각기 명목(名目ㆍ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라며 “지금은 이당과 저당〔彼此〕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오직 현자를 등용해 다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당파의 임금이 아니라, 온 나라의 임금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광해군은 즉위년 3월 북인 기자헌(奇自獻)을 좌의정, 서인 심희수(沈喜壽)를 우의정으로 삼았다가 기자헌이 탄핵을 당하자 5월에는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삼았는데, 심희수와 이항복은 모두 서인이었다. 영의정 이원익에 이어 세 정승 모두를 북인이 아닌 당파를 등용한 것이다. 물론, 광해군은 선조 말년 자신을 제거하려는 영의정 유영경을 탄핵하다가 선조로부터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로 비난 받고 평안도 영변으로 유배 갔던 대북 정인홍을 석방시켜 한성 판윤에 임명하는 것으로 대북도 챙겼다. 하지만 핵심은 연정(聯政)에 있었다. 남인·북인·서인을 아우르는 거국내각은 광해군의 기대에 부응해 전란 극복에 초당적으로 나섰다. 광해군 즉위년에는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조선 최대의 민생법안인 대동법을 시범 실시했다. 재위 2년 허준(許浚)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고 전란으로 무너진 토지제도를 바로 잡기 위한 양전(量田)사업도 추진했다. 지금까지 언급되는 광해군의 주요 업적은 대부분 연정 시절 이룩된 것이었다. 게다가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항복, 우의정 심희수는 모두 당론만을 따르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이원익은 광해군의 형 임해군을 죽이려는 북인에 맞서 살려주어야 한다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창했다. 또한 심희수도 서인이었지만 정여립의 옥사 때는 동인들을 대거 살육하려는 서인들에게 맞섰던 초당적인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당파보다는 나라 전체를 더 생각했던 국인(國人)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거국내각은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오현(五賢)을 공자를 모신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려는 ‘오현종사 운동’이나 인목대비 폐위 같은 비생산적인 이념논쟁에 휘말리면서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하는 대북만으로 정국을 운영하다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맞게 된 것이다.
현재 연정을 전제로 삼는 개헌 논쟁에 광해군의 사례는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6ㆍ29 이후 지금까지 선거 때는 국민통합을 약속하고서도 당선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파만의 결집을 통한 국민 분열을 부추기는 행태가 반복되어도 아무런 제어 방법이 없는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점에는 많은 식자(識者)들이 공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 전체보다 당파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런 행태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이 광해군을 죽이려 할 때 반정 세력에 의해 다시 영의정으로 발탁된 이원익이 “그를 섬긴 노신(老臣)으로서 차마 들을 말이 아니니 조정을 떠나겠다”고 반발해 죽이지 못했다. 즉위 초의 연정은 광해군 자신의 목숨도 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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