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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를 빨갱이로 둔갑시킨 공안당국, 폭압·공포가 지배했던 군사정권 시대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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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를 빨갱이로 둔갑시킨 공안당국, 폭압·공포가 지배했던 군사정권 시대 풍자

입력
2014.10.1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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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차남들의 세계사'

그 시절, 남산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였던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는 표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기호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는 폭압과 공포가 지배했던 80년대 한국 사회를 회고하는 표정 중 아마도 가장, 또는 유일하게 익살스런 표정일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의 황당한 독재자 중 한 명인 전두환 장군의 통치 시절 이야기이다”로 포문을 여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거침 없이 이죽거리기 시작한다. “그는 수사를 하다가 대통령에 취임한, 세계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사관이었다. … 하도 열과 성을 다해 수사하느라 피격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의 직속 상관들까지도 모조리 체포하고 구금했던 전두환 장군은, 그래도 성이 다 차지 않았던지 그냥 자신이 피해자의 신분을 대신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수사관은 항상 피해자의 심정으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사건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두환이 아닌,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란 고아 출신 택시기사 나복만이다. 어린 시절 고아원 형들의 지속적인 폭력으로 인해 축 처진 눈썹과 쉴새 없이 굴러가는 눈동자, 똑바로 섰는데도 어딘가 어정쩡한 자세를 갖게 된 나복만은, 잘못한 것이 없어도 괜히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사내다. 폭력의 시대와 나복만의 이런 외적 조건은 흡사 볼트와 너트처럼 꼭 들어맞는 것이라, 시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복만의 삶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의 용의자가 원주로 숨어들면서 도시 전체가 비상에 걸린 시점, 택시기사 나복만은 자전거 탄 소년을 살짝 치는 실수를 범한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찾아간 경찰서의 부서가 하필 안기부 요원들이 24시간 죽치고 앉은 정보과라는 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스물아홉 살에 처음 떨어진 수배는 이후 30년이나 그를 따라다닌다.

도로교통법 위반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만들기 위한 당국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나복만을 고문한 안기부 요원은 마침 부실한 ‘실적’ 때문에 서울에서 원주로 귀양을 간 인물이다. 각하의 안위를 위해 더 많은 빨갱이를 잡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탓하던 그의 눈에 나복만의 어수룩한 외양은 그야말로 간첩의 전형이었다. 나복만이 끌려간 안기부 원주지부 지하 취조실 3번방에서 근무하는 스포츠 머리의 남자는 ‘생계형 요원’이다. 늙은 부모와 동생 여섯을 먹여 살린다는 사실에 크나큰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빨리 간첩임을 실토하지 않는 나복만 때문에 잔업 수당 없이 추가 근무에 돌입하게 되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고민은 일을 그만둬야겠다는 반성이 아닌 ‘이 놈이 정말 문제 있는 놈인가 보다’라는 확신으로 전진하고,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채 과거 어느 때보다 잔인한 고문을 자행한다.

시대의 공포와 그 공포가 낳은 폭력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을 작가는 유머를 잃지 않은 채 좇아간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차남들의 세계사’를 “암울했던 한국의 80년대에 대한 ‘이기호 식’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그는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본인의 의도와 상관 없이 상황에 억눌리는 모습을 경쾌하고 발랄한 화법에 실어 우리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왔다”며 “전작들의 무대가 주로 일상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폭을 넓혀 80년대를 끌어왔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고 말했다. 또 “장편 대하소설들처럼 모든 기록을 조합해 펼치는 대신 지극히 부분적인 개인의 역사에 집중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우리 개개인에게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강력하게 던지고 있다”라고 평했다.

황수현기자

저자 약력

1972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등이 있다. 이효석 문학상과 김승옥 문학상을 받았으며, 현재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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