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공부보다는 문화와 환경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됐다. 재즈 탐구도 그 일부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허대욱(37)의 이름 앞에는 이제 으레 ‘재즈’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것은 프랑스적 분위기의 음악이 좋아 대학 졸업 후 거의 무작정 파리로 떠났던 10여 년 전의 자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압축하는 기호에 가깝다. 9년째 파리 근교에 살며 가장 프랑스적인 문화, 특히 재즈를 익힌 그가 삶의 일부로서 재즈라는 기호를 들고 모처럼 서울을 찾았다.
허대욱 재즈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프랑스 인상주의의 잔영이다. 그 쪽 진영의 작곡가들, 특히 피아노곡 ‘쿠프랭의 무덤’ 등을 남긴 라벨의 작품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인상주의가 좋아 프랑스로 갔고 콘서바토리의 문을 두드렸다. 에브리음악원(Conservatoire d’ Evry)에서 재즈 피아노를 공부했고, 그것도 모자라 생모음악원(Conservatoire de Saint-Maur)에 들어가 더 공부했다. 20대 후반이었던 그로서는 20대 초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는 심리적 불편함까지 달게 받아들여야 했다.
“프랑스 특유의 고급스런 재즈를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전위 재즈를 주조로 한 20여 분간의 솔로 즉흥으로까지 발전시켰다.”
두 곳을 마친 그에게 중요한 만남이 찾아왔다. “더 큰 배움을 위해 수소문 끝에 재즈 피아니스트 필립 레바랄렉이 하는 파리의 빌 에번스 아카데미를 찾아 갔다.”즉석 오디션이 벌어졌고, 극히 재즈적인 풍경이 예고 없이 펼쳐졌다. 한국 청년은 스탠더드 곡 ‘Whisper Not’을 주문 받았다. 제목은 들어봤지만 한 번도 쳐본 적 없던 곡이었다. 그는 아예 엉뚱한 선율의 완전 즉흥으로 답해줬다. 유심히 듣고 있던 필립이 “OK!”라며 반겼다. 재즈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계시 같은 우연이었다. 두 사람은 개인 지도를 거쳐 사제 관계로 발전했다. 지금은 거의 친구 사이다.
레바랄렉의 재즈는 미국 재즈 스타일과 다르다고 허대욱은 말했다. “미국 재즈와는 스윙의 개념부터 조금 다른 그의 재즈는, 이를테면 미셸 페트뤼시아니 스타일이다.” 골형성부전증에 걸려 키가 1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내한 콘서트에서 놀라운 연주를 들려주었던 페트뤼시아니의 이름을 그에게서 다시 듣게 된다.
미셸이 느닷없이 언급된 것은 레바랄렉, 나아가서는 프랑스 재즈를 그가 어떻게 체화했는지 설명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프랑스 재즈는 몽환적이다. 인상주의처럼 분위기를 중시하며 드뷔시를 방불케 하는 특색이 있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재즈는 선율이 매우 분명하다. 그 같은 양상을 두고 그는 “자국의 언어적 특성이 재즈로 심화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요즘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재즈가 강세인데, 프랑스 재즈는 말하자면 모든 어법이 융해된 용광로(melting pot)의 기능이 더 크다”며 ‘유러피안 재즈’의 현재 추세를 전했다. 그러나 그는 그 용광로에 녹아 들지 않았다.
“나는 그 같은 프랑스 재즈에 영향 받고 싶은 생각 전혀 없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인정하지만….”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걸로 재즈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넉 장을 헤아리는 그의 음반 중 2010년 작 ‘Trigram’은 그 같은 선택의 결정판인 셈이다.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한국 음반사 오디오가이에서 나온 이 음반의 전반적 주조는 동양적 색채다. 태극 사상의 괘(卦) 이념을 동양적 프리 뮤직 스타일로 표현했고, 농현 등 한국 전통음악의 고유한 특색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피아노의 타악적 음색으로 농현의 유려함을 표현한다는 꿈이 생겨난 것은 동양, 특히 한국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그 무렵 합정동 시절의 하우스콘서트 무대를 통해 만난 피아니스트 박창수와의 인연이 작품으로 내면화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그는 100여편 정도를 꼽는다.
하우스콘서트, 마포아트센터 등지에서 종종 국내 공연을 펼쳐온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강원도에서의 작은 무대다. “(내 생각으로는)‘죽을 쒔던’ 공연이다. 그런데 빈 자리 없이 들어찬 관객들이 보여준 무대에 대한 집중력과 뮤지션에 대한 배려 등은 최상급이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무대 후, 전위적인 색채는 말끔히 지우고 따뜻하며 서정적인 선율로 솔로 연주를 들려 주었던 것은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키스 자레트의 피아노 솔로처럼 그의 재즈는 전위와 전통을 오간다. 그는 서정성과 전위의 공존을 주장한다. 바로 현재 그의 존재 방식이다. “김치를 케이크와 함께 먹는 극단성을 재즈로 포용하는 것”이라고 그는 적절하면서도 개성이 넘치는 비유를 들었다.
이번 내한 콘서트는 클래식적 성향이 강하다. 서정적 현악 선율과의 조화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운이 남는 노래 같은 곡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빠른 템포의 ‘To The West’는 불교의 서방 정토를 염두에 둔 곡이다. ‘딴뚠 Song’은 어린 조카가 혀 짧은 소리로 내뱉은 “딴뚠(삼촌)”이라는 말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
현악과 협연하기는 처음이다.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기본인 전통적인 재즈 트리오 구성에 8인조 현악앙상블이 함께한다. 재즈 콘서트로는 매우 독특한 편성이다. 지휘란 모든 악기들의 하모니를 일궈내는 도구다. 이번에는 현악기를 연주하는 프랑스인 음악 친구가 담당한다. 그는 현악기와 시도하는 이 첫 호흡이 발전해 대편성 오케스트라와의 작업으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이번 콘서트는 미학적 탐색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7dse West, La10월 30일 서울, 11월 1일 부산의 LIG홀에서 공연하고 11월 17일 한국을 뜬다. “언젠가는 한국에 와서 살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aje@hk.co.kr
☞ 허대욱 ‘Trigram’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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