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민지 시절에도 권리 제한… 자기 정부 선출해 본 경험 없어
조직화 되지 못한 거리시위대… 수 많은 단체 제각각 목소리 냈지만 2주일 이상 도로 점령 놀라운 사건
정치 행위 즐거움 알게 돼… 항명 통해 변화를 만드는 법 학습
홍콩 거리의 시위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강제 해산이 확실하다며 긴장이 고조되던 10월 5일 밤에도 주도 단체들은 우왕좌왕했다. 도심 점거도 원래 중국 국경절인 10월 1일로 계획했지만, 정부의 강경 대응에 갑자기 9월 28일로 앞당겨졌다. 학생과 시민들이 처음부터 도로 점거를 다들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이번 운동을 주도한 대학생회연합 ‘학련(學聯)’, 중고등학생 단체 ‘학민사조(學民思潮)’ 그리고 교수와 원로 목사가 이끄는 ‘센트럴 점령’ 외에도 많은 단체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행동을 누가 하는 건지 서로 다 알지 못했다. 누가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는지, 누가 도로 위에 사당과 교회를 만들었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 뛰어나와 도로를 2주일 이상 점령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대체 홍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젊은이들은 왜 우산을 들고 거리로 나왔나
이번 사태에 대해 그 동안 언론에서는 주로 세 가지를 강조해왔다. 홍콩에서 직선과 민주주의가 가지는 중요성, 중국에 대한 반감이 터져 나왔다는 점, 젊은이들이 경제난으로 힘든 현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점, 즉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경제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맞지만, 반씩만 맞다.
첫째, 직접적 계기는 행정장관 선거 문제이다. 원래 2017년부터 직선으로 뽑기로 2007년에 정해졌지만 구체적 방법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8월 중국 정부가, 별도의 지명위원회에서 뽑힌 후보들만 직선에 나올 수 있다고 결정했다. 완전 직선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높아지던 상황에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홍콩인에게 민주주의가 원래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을까? 사실 영국식민지 시절 홍콩인은 자기 정부를 선출할 권리를 거의 가져본 적이 없다. 입법회(국회) 일부를 직선으로 뽑을 수 있게 된 것도 1990년대 와서였다. 중국 반환을 앞두고 마지막 총독 패튼은 직선 의석을 대폭 늘리고 선거연령을 낮추는 등의 개혁을 시도했고, 97년 반환을 앞둔 중국 정부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크게 반발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원래 갖고 있던 민주와 자유를 빼앗겼다’는 기억을 홍콩인에게 남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을 폄하해선 안 된다.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민주에 대한 열망이 커진 것 또한 사실이다.
둘째, 이들은 중국 정부에 반대하려고 길거리로 나왔는가? 최근 홍콩에서는 여러 사건으로 반중 감정이 커져 왔다. 본토 여행객이 홍콩에서 분유를 잔뜩 사가서 팔고, 본토 임산부가 급증하여 산부인과 병상이 부족해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홍콩 남자들이 그 동안 본토에서 낳은 자녀 수만 명이 1997년 홍콩의 중국반환 직후 몰려와 거주권을 달라고 요구할 때부터 홍콩인들은 경악했다. 가난하고 수준 낮은 중국인들이 몰려와 홍콩을 침몰시킬 거라는 두려움이 커졌다. 2003년 정부는 국가반역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입안하려다 50만 명의 항의시위로 실패하기도 했다. 2003년 사스 후 어려워진 홍콩 경제를 돕고자 중국 정부는 본토인의 홍콩 여행 규제를 완화했고, 급증한 본토 여행객은 경제를 부활시켜 준 대신 많은 갈등을 낳았다. 2012년 홍콩 정부는 중국식 애국교육을 도입하려다 10만여 명의 항의로 포기했다.
하지만 이런 반중 감정이 전부는 아니다. 반환 후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인의 신뢰도와 만족도는 크게 올라가기도 했다. 중국식 교육은 반대했지만, 중국에 대해 무조건 배우기 싫다는 건 아니었다. 본토인과 결혼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홍콩인들은 중국을 조국으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셋째, 젊은이들이 심각한 취업난과 주택난에 대한 불만으로 뛰쳐나온 것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앞날이 불투명한 청년세대가 깊은 좌절을 안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경제 때문이라면, 왜 그 불만이 ‘직선’에 대한 요구로 터져 나왔는지, 왜 젊은이들이 도로에서 불편하게 자면서도 웃고 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원래 홍콩에서 젊은이들은 사회정치문제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이들이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사건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중고등학생이 이끈 2012년 중국식 교육 반대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부두철거 반대 운동이다. 문제는 결코 ‘경제’만은 아니었다.
도심 점거는 정체성 지키려는 싸움
홍콩에서 젊은이들의 도심 점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 정부는 홍콩섬 센트럴지역의 ‘스타페리’ 부두와 종탑을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비좁은 땅에 사는 홍콩인에게 철거와 재개발은 익숙했지만 당시는 달랐다. 주룽(九龍)반도와 홍콩섬을 잇는 스타페리는 모두의 추억이 어린 대중교통수단이었고, 페리로 드나들던 부두와 종탑은 홍콩의 상징이었다. 젊은이들은 우리의 기억을 없애지 말라며 뛰쳐나와 농성하며 항의했다. 강제철거가 있던 날 경찰에 들려나오며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홍콩 시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반환 후 사회운동에서 젊은 세대의 첫 등장이었다.
정치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대학생과 젊은이들은, 건물과 유적지의 잇단 철거에 반대하며 처음으로 홍콩 곳곳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간마다 담긴 공동의 기억을 발굴해내기 시작했다. 공간을 통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싸움은, 홍콩이 왜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하는 고민으로 이어지며 점점 사회정치운동과 연결되었다. 이번 시위는 센트럴 점령운동으로 불리우기도 했는데, 이때 센트럴은 도시의 심장부를 의미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시위대가 실제 점거를 시작한 곳은 근처의 정부청사 앞 공간이었다. 학생들은 “광장을 돌려달라”고 외치며 정부청사 앞으로 달려들어갔다. 도심의 핵심부를 둘러싼 싸움을 통해 정체성을 찾고 주장을 펴는 행동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연습된 것이었다. 물론 이처럼 대규모로 도로를 점거한다는 건 사전에 상상도 계획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홍콩에 무엇을 남겼는가
이번 도심 점거운동은 홍콩에 무엇을 남겼는가?
첫째, ‘항명(抗命)’이라는 사고방식과 행동이 생겨났다. ‘센트럴 점령’ 단체를 이끄는 법대 교수는 2013년, 시민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파괴적 무기는 비폭력적인 항명(불복종)이라며, 도심부를 평화적으로 점거하여 항명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홍콩인은 한번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본 적이 없다. 중국 반환도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들은 항명을 통해 변화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둘째, 정치행위를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번 운동과정에서 홍콩시민들은 이토록 창의적인 홍콩을 본 적이 없다며 감탄했다. 홍콩인에게 시위나 정치는 두려운 것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정치는, 1967년 홍콩의 한 공장 파업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폭동으로 번진 것이었다. 정치에 대한 공포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유혈 진압으로 증폭되었다. 그러던 홍콩인들이 두려움을 벗어나 즐겁게 시위하기 시작했다. 우산은 경찰의 후추스프레이와 최루탄을 막기 위해 등장한 아이디어였다. 점거 기간 내내 우산을 주제로 매일 새로운 예술작품이 쏟아져 나왔고 도로 곳곳엔 기발한 문구와 그림이 펼쳐졌다. 젊은이들은, 어차피 노력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암울한 현실이라면 차라리 원하는 일을 하겠다며, 즐겁게 싸우고 다양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나가고 있다.
이번 사건은 어떻게 끝날까? 시위대가 요구한 완전한 직선의 관철 여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시위대는 중앙정부를 전복할 생각이 없음을 누차 강조해 왔다.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한둥팡(韓東方)의 말처럼, 홍콩도 중국도 민주를 연습해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지난 20여일 간 도로 위에서 그들은 공동체를 경험했다. 침대와 샤워실을 만들고 자습실을 만들어 함께 공부했다. 대학생은 중고등학생을 가르쳐주었다. 교회도 관우사당도 만들었다. 비 맞고 서있는 경찰에게 우산을 씌워주던 시위대의 사진은 감동을 주었고, 정부청사 앞에는 그 모습을 본 따 만든 거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런 기억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5일 학생들이 점거한 고가도로 위를 함께 걷던 홍콩 친구는 “이런 일이 마지막이 아니고 또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장정아 인천대 교수ㆍ중국학술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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