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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작가의 국적과 어떤 망상

입력
2014.10.1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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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됐다. 누가 그 상을 받게 될 지를 놓고 언론에서 설왕설래하는 풍경이 또다시 반복됐다. 한국 작가의 수상 가능성을 심층 분석하는 식의 기사도 여전했다. 지난 한글날 저녁, 결과가 발표됐다. 수상자는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였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내가 오랫동안 좋아해온 작가였다. 나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작가들에게도, 충실한 문학 독자들에게도 두루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였다.

그는 프랑스 작가다. 그렇지만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따라 읽어온 사람이라면 아무도 ‘프랑스에 영광이 돌아갔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그의 장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떠올릴 것이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국적이 캐나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천편일률적이다. ‘한국 또 비켜 간 노벨문학상’ ‘한국 노벨문학상 염원 이루려면?’ 같은 기사들을 읽고 있으면 비켜간 노벨상을 아쉬워하고 노벨상 수상을 염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의구심이 든다. 일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등이 영광스런 수상자가 됐고 중국 작가 모옌도 노벨문학상을 조국에 안겨줬다는 내용을 읽으면, 조국에 영광을 돌리지 못한 한국 작가들은 어디 한데 모여 집단 반성의 장을 열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어서 세계문학시장의 중심에 들어갈 만한 경쟁력을 갖춰야한다는 준엄한 비판 앞에서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앞에서 나는 다만 세계문학시장의 중심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중심은 어디이고 주변은 어디인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이제는 중심과 변방을 나누는 잣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되물을 시점이 아닌가 싶다.

한국문학 작품이 영어권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과를 거뒀을 때 그것을 보도하고 분석하는 시선은 국가 대항 스포츠경기에서 메달을 딴 운동선수를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작품과 작가가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했으니 얼마나 장하고 기특하냐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것은 비단 문학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예술 텍스트가 세계 진출이라는 명제 앞에만 서면 갑자기 너무도 당연하게 애국상품의 대상으로 변하는 광경은 자주 목격된다. 이런 풍토에서 세계에 소개되는 우리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깊게 파고드는 하나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우주로서가 아니라 국적 뒤에서 익명화할 우려가 있다.

한국문학작품이 이른바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것, ‘세계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장이라는 곳에는, 동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의 ‘팔릴만한’ 문학작품을 선택하는 해외 에이전트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물음을 던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외 에이전트에게 선택되지 않은 제3세계 작가의 작품은 훌륭한 문학이 아닌가? 예술작품이 거래되는 그 세계시장이라는 곳의 건전성과 자율성을 우리는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가?

대답 대신 나는 이런 망상에 빠져본다. 세계문학시장에서 명예를 드높이고 싶은 한국의 젊은 작가가 있다고 치자. 그는 눈 밝고 공평한 에이전트가 자신의 명작을 하루빨리 발견하도록 고대해야 할 것이다. 그 수동적인 방법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면, 작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세계시장’에서 소비 될 목적으로 쓰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전 세계에 통하는 보편성의 지점을 영리하게 파악하되, 서구의 에이전트와 독자들이 동양작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어 하리라 예상되는 어떤 것, 그들에게 이국적이라 비춰질 정서를 작품 밑바탕에 까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뛰어난 번역가를 만나는 것은 몹시 어렵다고들 하니 아예 직접 영어로 써서 미국 시장에서 먼저 출간하는 방법이 제일 빠를지도 모른다. 그래. 역시 관건은 영어다! 전국의 문학청년들이여, 대동단결하여 영어 공부를 하자! 이런 실없는 농담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게 들린다는 점이 어쩐지 서글프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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