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뒤 6개월. 세상은 그대로다. 바꾸지 못했다. 수치다. 선의로 무능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결과로 도덕은 완성된다. 브레히트는 책임윤리를 바랐다. 신념윤리도 없는 정치인에게.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은 지 6개월이 지났다. (…) 한 생존 학생은 법정에서 “선원들의 처벌 보다 왜 친구들이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승객들은 왜 구조될 수 없었는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던 정부는 뭘 하고 있었는지, 세월호의 실소유주였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정ㆍ관계에 어떤 로비를 했는지, 속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세월호 선원, 정부의 재난 책임자, 구조당국 모두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결국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악마가 한 일’일 게다. 빵 굽는 아저씨, 빵이 잘못 구워졌어요!/빵이 잘못 구워질 리가 없는데/좋은 밀가루를 썼고/구울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거든/그래도 잘못 구워졌다면/악마가 한 일일 게다/악마가 빵을 잘못 구웠다(브레히트 ‘악마’ 중) 무능한 정치인들은 세월호 참사를 선거에 이용했다. 여야는 참사를 계기로 안전대책을 쏟아내며 이 참에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선거가 끝나자 태도를 바꿨고, 세월호특별법은 정쟁의 도구로 전락했다.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다. 상복을 입은 오세그의 과부들이/국회 앞으로 몰려갔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 주세요 여러분/오늘 아무 것도 못 먹은 이 아이들을!”/그러자 국회의 나으리들은 일장 연설을 했다/“이렇게 하지”라고 국회의 나으리들은 말했네/“오세그의 과부들에게 연설이나 해드리지.”(브레히트 ‘오세그의 과부들을 위한 발라드’ 중) 1934년 체코 오세그의 탄광에서 수직 갱도가 무너져 142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 역시 당국의 허술한 안전관리로 인한 인재였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와 닮았다.”
-세월호 6개월, 브레히트의 시(한국일보 ‘36.5°’ㆍ한준규 사회부 차장대우) ☞ 전문 보기
“1. 시인 진은영은 연민을 멀리하고 수치심을 느끼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연민은 왜 안 되는가? 시인은 수전 손택의 글로 대신 답한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타인의 고통’)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 특집(4ㆍ16, 세월호를 생각하다)에 실린 글에서다. (…) 2. ‘제보자’는 황우석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을 모티프로 한 극영화다. (…) 황우석의 ‘과학사기’ 사건은 과학과 윤리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법적 판단도 끝난 사안이다. 사기 혐의는 유죄이며 서울대 교수직 파면도 정당하다는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었다. 하지만 황우석은 건재하다. 2010년 6월 황우석의 수암생명공학연구원 기공식은 국회의원, 전직 고위관료 등 3000여명이 성황을 이뤘다. (…) ‘황우석’을 떠받치는 힘과 세월호 사건의 진실규명을 가로막는 세력은 얼마나 다를까?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과 달리 제보자 심민호 연구원이 아닌 언론인 윤민철 피디다. 왜? 임순례 감독은 “이 영화는 진실을 수호하는 분들에 대한 헌사”이자 “제보의 중요성보다는 언론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고 밝혔다. (…) 이쯤에서 나는 시인이 권고한 수치심과 함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선량하게만 살다 떠나지 말고, 좋은 세상을 남기고 떠나라!”(‘도살장의 성 요한나’)라는 절규를 되새길 수밖에.”
-세월호와 황우석, 수치심에 대하여(10월 16일자 한겨레 ‘편집국에서’ㆍ이제훈 사회정책부장) ☞ 전문 보기
책임은 어디 있나. 보수지의 강요 해법은 자책이다. 남 탓은 미성숙 인간의 몰염치란 설명. 하지만 정작 불의한 건 신(新)유신정권이다. 면책용 질책인 셈. 희망은 행동하는 시민이다.
“충격적인 입시 비리가 꼬리를 밟혔다. 수상 경력과 봉사 활동을 통째로 날조한 한 학생이 2012년과 2013년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서울 명문대에 합격한 사례다. (…) 입시 부정은 중대 범죄지만 더 위중(危重)한 것은 부정을 주도한 학생 어머니의 발언이다. 대학 강사라는 그녀는 경찰에게 “왜 나만 갖고 그러세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라고 항변했다. 참으로 무서운 발언이다. 그녀의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아니라 그 말이 폭로하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타락상이 끔찍하다. (…) 불법과 편법의 달인(達人)들이 득세하고 법과 양심에 충실한 이들이 손해 보는 한국 현대사의 경험은 한국인의 생활 세계에서 정직성을 고지식함ㆍ우둔함과 동의어로 변질시켰다. (…) 자신의 잘못으로 궁박(窮迫)하게 된 상황에서 변명하는 건 인간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의 정치학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 장애물이 되고 있다. 스스로 운명을 감당하는 성숙한 존재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기는커녕 불특정 다수인 남이나 사회 전체에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한국인에게 마음의 습관이 되고 말았다. (…) 성공을 설명할 때조차 바깥 요인을 중시하는 터에 자신의 부정이나 실패의 책임을 바깥에 돌리는 건 자연스럽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그만큼 비주체적이다. 자기 일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과 나라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내 탓이오’의 목소리는 드물어도 ‘남 탓, 국가 탓’은 넘쳐난다. (…) 미래의 희망과 인간의 자존감은 결코 거저 오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의 유혹을 온몸으로 물리쳐야 비로소 ‘인간으로서 잘사는 게’ 가능해진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의 政治學(조선일보 기명 칼럼ㆍ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 전문 보기
“배추값이 10% 오르면 가정에서 느끼는 부담은 겨우 200원이고 집값이 10% 오르면 2,320만원(한국주택 평균가 2억3,200만원, 2014년 6월 한국감정원 기준)인데 물가에서는 같은 대접을 받는다. 배추나 무 마늘이 흉년이 들어 농민이 가격좀 받으려고 하면 요란을 떨면서 중국산을 들여와 가격을 낮추려 한다. 집값은 떨어져야 서민들이 살기 편한데 박근혜 정부는 거꾸로다. 어떻게든 높이려고 대출규제를 완화하고 거래세를 깎아준다. 정부가 세수가 부족하니까 담뱃값에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인상하고 유아들 보육비며 노인들 기초연금을 전부 지방정부로 떼어넘기겠다고 밝혔다. (…) 이명박 정부 1년차에 20%이던 법인세는 작년에 16%로 떨어졌다. 이로 인한 세수 손실은 연간 9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큰 돈을 버는 법인에게 약간의 부담을 지우면 될 일을 안 하고서 서민들에게 큰 부담을 지운다. 대와 소에 대한 판단이 크게 흐트러져서다. (…) 공과 사에 대한 판단도 흐트러졌다. 대통령의 공무시간 7시간은 밝히지 않으면서 개인의 사생활은 마구 파헤치려 한다. 대통령 비난하는 낙서 한 줄을 쓴 사람을 잡겠다고 기초생활수급자 3,000명의 명단을 파헤치고 인터넷에 올린 글의 작성자와 스마트폰의 개인메시지를 사찰한다. (…) 세상도 말 못하게 험악해졌다. (…) 어린이집 원장이 말 못하는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힌다. 교사들이 말리려고 해도 일자리를 잃을까봐 말을 못한다. 아파트 경비가 주민의 온갖 폭언에 시달리다가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 세상이 험악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쁜 이들이 처벌을 받기는커녕 권력을 쥐고 흔들기까지 하니까 가해자가 승자 같고 승자가 올바른 사람 같아서 그럴 것이다. 한국사회 전체에 가치전도가 무서운 속도로 일어나고 있기는 하다. 이러다간 권력을 비판하면 곧바로 잡혀가던 박정희 시절로 되돌아간다고 장탄식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 그러나 시민의 수준이 다르다.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사람들이 문제를 삼기 때문이다. (…) 탈북자들이 북한에 삐라를 뿌려서 북한으로부터 총탄공격을 받았는데도 정부가 말리지 않자 연천주민들이 반대시위에 나섰다. 개인메시지 사찰에는 탈퇴로 맞선다. (…) 2014년의 시민이 70년대로 가는 정부를 막을 것이다. 사생활은 보호하고 공생활은 투명하게 밝히는 정부, 소가 아니라 대를 보고 정책을 세우는 정부를 만들려는 압박은 더 많아져야 한다.”
-공과 사, 대와 소(한국일보 기명 칼럼ㆍ서화숙 선임기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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