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李瀷ㆍ1681~1763)의 글 중에 ‘접대유생(接對儒生)’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임금께서 유생들을 접대하셨다’는 뜻이다. 정암(靜庵) 조광조가 임금과 신하가 학문과 정사를 토론하는 경연(慶筵)자리에서 중종에게 “태학(太學ㆍ성균관)의 유생들을 때때로 만나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주청했다. 중종이 이를 받아들여서 성균관 유생 이세명(李世銘)·박광좌(朴光佐) 등이 뽑혀서 임금 앞에 이르렀다. 두 태학생에게 경서를 강독하게 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가?”라고 물었으나 머뭇거리며 답하지 못했다. 답답해진 조광조가 곁에서 “유생으로서 성경(聖經ㆍ성스런 경전)을 외우고 익히면서 나라 다스리는 이치를 강구했으니 어찌 하고자 하는 말이 없겠는가?”라고 거들었으나 유생들은 끝내 한 마디 말도 못했다. 그래서 조광조가 오랫동안 탄식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이익은 이 사례를 볼 때마다 세도(世道)를 위해서 탄식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를 과거(科擧) 급제에만 힘쓰는 학문풍토에서 찾았다. 과거제도가 성행하면서 선비들이 허문(虛文)에만 힘써서 붓을 잡으면 곧 문장은 작성하지만 하나도 쓸모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급제에만 뜻이 있으니 임금이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데도 제대로 된 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과거를 위한 문장을 과문체(科文體), 또는 과문(科文)이라고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시험에 더 매달렸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과거급제용 수험서들이 성행했는데, 과문초집(科文抄集)이 그것이다. 줄여서 초집(抄集)이라고도 하는데, 기존에 치러졌던 과거의 기출문제나 앞으로 나올 예상문제를 모아놓은 수험서였다. 과문초집은 과거에서 통용되었던 시를 모아놓은 ‘과시(科詩)’와 모범 외교문서인 표전(表箋)을 모아놓은 ‘과표(科表)’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우수 답안을 모아놓은 ‘선려(選儷)’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수험서가 과거에 목을 매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 답안용 문장을 또 정문(程文)이라고 하는데, 조선 초ㆍ중기의 문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ㆍ1467~1555)는 ‘이동보(李同甫)에게 답하다’라는 글에서 “근래 익히는 학문이 정문(程文)에까지 미친 적은 없었다”고 편지에 썼다. 그것이 학문의 도리상 당연할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번잡하게 대답하는 일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문장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과거급제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번잡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 것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ㆍ1627~1704)의 문집인 갈암집(葛庵集)에는 ‘관학(館學)의 여러 학생들에게 깨우치는 글’이란 문장이 있다. 지금의 국립대학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것을 기념해서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서 훈계한 글이다. 이현일은 선비된 자들이 암기만을 능사로 생각해서 과거의 이익만을 목표로 할뿐 궁리(窮理), 수신(修身)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경세(經世)의 학문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늘상 “도학(道學)이 비록 아름답지만 지금 세상에 어찌 가능하겠느냐? 지금 세상에 태어났으니 지금 세상을 위해서 다만 오로지 정문(程文)에 종사해서, 뜻은 오로지 암기나 익히고, 과거에 급제해서 몸을 영광되게 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한다고 개탄했다. 이현일이 더욱 개탄해 마지않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치고 형이 동생에게 아우에게 권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에게, 형이 아우에게 학문보다는 과거급제만을 종용한다는 비판이었다. 이현일은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그 스스로 벼슬의 뜻을 접고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학문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현일이 벼슬했을 때는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숙종 때여서 출세를 위한 학문만을 지향하는 시대에는 맞지 않았다. 이현일은 노론 집권 후 함경도 홍원과 종성 같은 최북단과 호남의 광양 같은 최남단으로 유배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지 100여년 만인 순조 10년(1810) 그의 문집인 갈암집 이 간행되었지만 여전히 집권당이었던 노론은 그의 책을 불사르고, 목판을 훼손하는 분서훼판(焚書毁板)을 자행해서 그의 문집 초판본이 전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경세(經世)의 학문에 대한 그의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익은 ‘접대유생’에서 과거공부에 힘쓰다가 “다행히 소원을 이루게 되면 조정 높은 곳에 앉아서 큰소리를 치며 벼슬아치들의 출척(黜陟ㆍ떨어뜨리고 올림)을 뜻대로 하니 어찌 세상이 타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 입시철이 돌아오자 현행 입시제도에 대한 여러 문제점들이 집중 보도되고 있다. 이익이나 이현일처럼 ‘공부는 왜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할 때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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