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때로는 그런 일도 있었냐는 듯이 급속하게 변하는 것도 적지 않다. 흡연자의 지위도 그런 종류다. 필자의 기억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버스 내에서 담배 피는 광경은 드물지 않았다. 나아가서 조선 후기 선조들이 현재 흡연가들이 겪는 곤란한 처지를 목도한다면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것이다. 조선 후기 인조 16년(1638) 8월 4일자는 우리나라 사람이 남령초(南靈草)를 심양에 몰래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돼 크게 힐책을 당했다는 기사가 있다. ‘남령초’가 바로 담배이다. 같은 기록은 “일본국에서 생산되는 풀로서 그 잎이 큰 것은 7~8촌(寸)이나 되는데, 가늘게 썰어서 대나무 통에 가득 담거나 혹은 은이나 주석으로 만든 통에 담아서 불 붙여서 흡입하면 맛이 쓰고 맵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 건너왔기에 ‘남(南)’자를 붙이고, 신령한 약초라는 뜻에서 ‘영초(靈草)’자를 써서 남령초라고 한 것이다. 같은 기록은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잘 시킨다고 하지만 오래 복용하면 가끔 간(肝)의 기(氣)를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촉진시키는 치료약으로 생각했지만 이미 오래 흡연한 사람들에게는 간기능 손상이 온다는 사실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심양으로 들여보냈다는 말은 청나라 사람들에게 밀수출했다는 뜻이 아니라 심양에 인질로 잡혀 있는 소현세자 일행에게 보냈다는 뜻이다. 인조실록은 “이 풀이 병진ㆍ정사(丙辰ㆍ丁巳ㆍ광해군 8~9년ㆍ1616~17) 연간에 바다를 건너왔는데, 가끔 피우는 자가 있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신유ㆍ임술(辛酉ㆍ壬戌ㆍ광해군 13~14년ㆍ1621~22)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자가 없어서 손님을 대할 때 차와 술을 대신했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이르고 혹은 연주(煙酒)라고 이르렀다”고 전하고 있다. 담배가 광해군 8~9년 경 전해졌는데, 불과 5년 만에 피우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이다. 같은 기록은 “오래 피운 자가 해가 있을 뿐 이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끊으려 했지만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妖草)이라고 일컬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임란 때 의병장을 역임했던 조경남(趙慶男ㆍ1570~1641)은 속잡록(續雜錄) ‘임술년(광해 14년ㆍ1622)’조에서 “남령초가 세상에 성행했다”면서 “일명 담박괴(談博怪)라고 하는데 4~5년 전에 일본 남방 사람으로부터 그 종자를 얻어 심어서 부자가 된 사람이 많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시 광해군 8~9년 경에 담배가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담박괴’는 담바고를 뜻하는 것인데,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ㆍ1814~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남쪽 오랑캐의 나라(南蠻國)에 담파고(淡婆姑)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담질(痰疾)을 앓다가 남령초(南靈草)를 먹고 낫자 그 여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담파고’는 토바코(tobacco)의 음역(音譯)으로 추측되는데 담파고라는 여인 이름에서 담(痰)을 제거한다는 담파고(痰破姑)로 변하면서 약으로 인식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도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여겼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서 혹정(鵠汀)이란 호를 사용하는 왕거인(王擧人)과 담배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박지원은 자신도 애연가라면서 “만력(萬曆ㆍ명 신종 연호ㆍ1573~1620) 연간에 일본으로부터 들어왔는데 지금은 토종이 중국 것과 다름없습니다. 청(淸)나라가 아직 만주에 있을 때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들어갔는데 그 씨가 본래 일본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남초(南草)라고 이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거인은 “이(담배)는 원래 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양 배편으로 온 것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왕거인은 “서양의 아미리사아(亞彌利奢亞ㆍ아메리카)의 임금이 여러 가지 풀을 맛보고는 이것으로 백성들의 입병을 낫게 했답니다”라고 덧붙이면서 “사람의 비장(脾臟)은 토(土)에 속하는데, 차갑고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겨서 입에 번지면 당장 죽지만 불로써 벌레를 쳐서 목(木)을 이기고 토(土)를 도와서 신효를 거두었기 때문에 영초(靈草)라고 불렀습니다”면서 동양의 음양오행까지 곁들여 설명했다. 왕거인은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허황하지만 이익을 낚는 데는 교묘하니 어찌 그 말을 다 듣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조선에서 국왕 중에 유명한 끽연가는 정조로서 재위 20년(1796) 초계문신(抄啓文臣) 친시(親試) 때 ‘남령초(南靈草)’를 과제로 내주기도 했다. 현재 흡연자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자로 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담뱃값 인상논란에서 보듯이 주요한 세금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흡연 외에 각종 공해 및 자동차 매연 등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잠잠한 것도 의아하다. 여기에도 무슨 메커니즘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든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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