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언제든 훼손된다. 찢어진 일상을 봉합하는 이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진저리를 치고, 어떤 이는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그런데 가끔 아무 말 없이 곁눈질만 하는 이들이 있다. 일상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이들, 그들의 표정엔 조바심이 가득하다. 지금 바로 덮기만 하면 아무도 모를텐데…중얼대는 그들의 손엔 실과 바늘 대신 천근 같이 무거운 뚜껑이 들려 있다.
정이현의 ‘뚜껑’은 두 젊은 엄마의 이야기다. 지원은 딸 ‘봄’을 혼자 낳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정신 없이 바쁘다는 것을 그는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콜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만 열여섯 살이 될 동안 봄이는 별 탈 없이 컸다. 플라스틱을 주워 먹거나 팔이 부러져 오기도 했지만 유난스럽게 속을 썩인 적은 없었다. 그러던 봄이가 아랫배를 부여잡고 나뒹군 것은 수학여행을 다녀온 당일 밤 12시가 다 돼서였다. 악성변비가 재발한 것이라 확신하며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간 지원에게 의사의 말이 떨어진다. “태아 거의 다 내려왔어요. 분만실 바로 올라갑니다.”
미영은 부동산에서 일하는 이혼녀다. 아들이 수학여행을 떠난 틈을 타 그는 부동산에서 만나 사귀게 된 남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성대한 오찬을 준비한다. 백화점의 프리미엄 식품관에서 구입한 제철 대하를 프라이팬에 가지런히 넣어 뚜껑을 덮고 5분 뒤,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함께 싱크대 주변은 유리조각으로 뒤덮인다. 깨진 뚜껑의 유리가 속속들이 박혀 엉망이 된 대하 앞에서 미영은 남자가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분노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난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뚜껑을 열어보지도 않았고, 가스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졸지에 갓난 아기의 보호자의 보호자가 된 지원은 딸이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를 보고 싶어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7개월도 못 채우고 나온 아기는 지원의 눈엔 “인간이라기 보다 어미 배를 억지로 가르고 꺼낸 유인원 새끼”다. 젖 말리는 약을 처방 받으러 간 지원은 의사로부터 아기가 곧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때부터 지원의 가슴이 뛴다. “어쩌면, 길은 끊어졌다고 생각한 바로 그곳에서 희미하게 다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갓난아기를 키우겠다고 고집하는 아들을 닥치는 대로 때린 미영은 다음날 아침 프라이팬을 꺼내다가 찬장에서 멀쩡한 새 뚜껑을 발견한다. 새 뚜껑은 프라이팬에 꼭 들어 맞았다. 알고 보니 엉뚱한 뚜껑을 덮었던 것이었다.
‘뚜껑’은 A4용지 10매가 약간 넘는 분량으로 짧은 편에 속하지만 섬뜩한 분위기와 입체적인 등장인물, 속도감 있는 전개로 무난히 본심에 진출했다. 문학평론가 백지연 씨는 “훼손된 일상, 기만, 은폐라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고 평했다. 그는 “청소년의 출산은 매우 극적인 사건인데 이걸 특별한 사건으로 부각시키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녹여냈다”며 “삶은 늘 균열과 위기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작가가 인간의 기만을 다루기 위해 지금까지 위악적인 캐릭터를 주로 사용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비교적 담담한 톤을 유지했다”며 “두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뚜껑이라는 상징을 은폐와 연결시키는 방식, 결말을 명확한 판단이나 해결로 마무리하지 않고 의문으로 남겨 독자에게 되돌리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작가 약력
1972년 서울 출생.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수상.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등이 있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