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풍 말고도 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참 많다.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한갓진 시골마을의 풍경이 이렇고, 볕 받아 오글거리는 호수는 여느 계절보다 가을의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가을에는 절터의 고즈넉함이 훨씬 더 깊고, 물길 따라 가는 강변길도 더 운치가 있다. 화려한 단풍 무리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전남 광양의 가을이 지금 참 곱다.
● 신선 놀던 계곡 아래 감이 주렁주렁
전남 광양 백운산 동쪽 자락에 백학동이 있다. 옛날, 백학이 많이 날아들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마을 앞으로 백운산 억불봉이 우뚝한데, 여기 올라서 내려다보면 동네가 마치 학이 날아가는 모양으로 보인단다. 풍수지리에 능했던 신라의 도선국사는 일대 지형을 보고 ‘풍수해가 없는 선계의 땅’이라며 감탄했단다. 행정구역상으로 진상면 3개 리(里)에 위치한 9개 마을이 포함된다. 가을 구경하러 백학동부터 들른다.

가는 길에 만나는 큰 저수지는 수어호다. 억불봉 보이는 전망대를 중심으로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돼 있으니 오다가다 들러 쉬어간다. 물빛이 하늘만큼 푸르니, 보는 눈과 마음도 절로 푸르러진다.
호수 지나 나타나는 마을마다 잘 익은 감이 천지다. 길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보다 나무에 매달린 감이 더 많다. 차진 대지와 풍성한 볕이 만든 산물이 보기에도 탐스럽다. 눈이 호강할 볼거리도 아닌데, 그냥 감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뿐인데, 이 풍경 마음 참 훈훈하게 만든다. 외갓집 앞마당 생각나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 떠오르니 감 하나가 주는 추억의 무게가 큰 산만큼 묵직하다.
백학동의 마을들은 대부분 ‘곶감마을’이다. 씨알 굵은 대봉으로 만든 곶감이 당도가 높아 인기다. 11월에 접어들면 잘 익은 감을 따서 정성스레 깎고 말리느라 마을 전체가 분주해진다. 손으로 주물러 납작하게 만들지 않고 그대로 말리는 것이 이곳 곶감의 특징이다. 이래야 맛과 당도가 잘 유지된다. 도시에서는 못 볼 것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걸린 감을 실컷 구경한다.

다음으로 어치계곡은 들른다. 백학동 끄트머리다. 여름이면 피서인파로 북적였을 이곳이 요즘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이 계곡 따라가는 임도가 산책삼아 걷기 딱 좋다. 백운산 등산로 가운데 하나인데, 주요 등산로에 비해 덜 알려져 가을 서정 만끽하기 그만이다. 임도 들머리에 있는 구시폭포가 유명하니 물어서 찾아간다. ‘구시’는 구유를 일컫는다. 이름처럼 폭포 아래 보이는 소(沼)가 구유 닮았다. 거대한 바위가 만든 천연의 구유는 보기에도 웅장하고 신비하다. 전설도 한 자락 걸쳤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신선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각자의 천마(天馬)에게 물을 먹인단다. 사계절 물이 마르지 않는 폭포지만 천마가 물을 마시는 이 날 새벽에만 구유가 바닥을 들어낸단다. 어쨌든 물이 귀한 요즘이지만, 정월 대보름이 아니므로, 폭포는 시원하게 떨어지고 있다. 구시폭포에서 위쪽으로 약 30m 올라가면 ‘선녀탕’이다. 작은 폭포 아래 만들어진 소가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넘친다. 선녀가 내려와 몸 씻고 간 곳이 여기 있었다.
한낮에도 이슬이 내린다는 오로대까지는 간다. 구시폭포에서 쉬엄쉬엄 걸어 30분이면 닿는다. 길은 숲 터널이다. 단풍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조금 일찍 떨어진 낙엽들이 바닥에 쌓여가는 중이라 운치는 제법 있다. 인적 드문 단풍 명소 찾고 있다면 이 길을 꼭 기억한다. 이달 말이면 이 울창한 숲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오로대는 큰 너럭바위다. 이곳에도 물은 마르지 않았다. 바위에 앉아 듣는 물소리 청명하고 어깨를 툭 치고 지나는 바람이 또 상쾌하다.

백운산은 이래저래 도선국사와 관련이 있다. 도선국사는 백운산 바라보이는 옥룡사에서 35년간 머물다 입적했다고 알려졌다. 세월 흘러 옥룡사는 사라지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이른 봄에 피는 동백꽃이 어찌나 예쁜지 이때를 기다려 멀리서 애써 옥룡사지를 찾는 이들도 있다. 백학동에서 백운산을 반 바퀴 에둘러 가면 서쪽 자락에 옥룡사지가 있다. 꽃은 없지만, 사는 것 퍽퍽하다 느껴진다면 가을날 절터 걸어본다. 부서져 흩어진 초석들이 역설적이게도 온전해 보이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지난 순간 게워내 곱씹는 일이 좀처럼 힘들어진 요즘이라 이렇게 만나는 한가로움이 참 반갑고 고맙다. 봄이면 생각나는 고로쇠나무 수액이 유명해진 것도 도선국사와 인연이 깊다. 옥룡사에서 가부좌 틀고 수도하던 도선국사가 일어서려다 무릎이 펴지지 않아 옆에 있는 고로쇠나무를 붙잡고 일어서는데, 가지가 부러지며 수액이 흘러나왔다. 이를 마시자 곧바로 무릎이 펴졌단다. 옥룡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도선국사마을도 있다. 원님이 식수로 애용했다는 ‘사또약수’는 물맛 좋다고 알려지며 인근 지역까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마을에선 다양한 농촌 체험을 할 수 있다. 민박집도 많으니 하룻밤 묵어도 좋다.
도선국사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백운산자연휴양림이 있다. 하늘로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로 맨발로 걷기 좋은 황톳길이 조성돼 있으니 더 추워지기 전에 걸어본다. 캠핑장도 있으니 관심 있다면 기억해둔다.

● 섬진강에 가을이 한 가득
그 유명한 매화마을이 있는 다압면 섬진강변은 봄에 꽃필 때 인파로 몸살을 앓지만, 요즘은 한갓지다. 쉬엄쉬엄 돌아보려면 요즘이 더 낫다. 강변 따라 드라이브 하다가 풍경 좋은 곳에 잠깐 멈춰 가을바람 맞으면 이곳이 ‘명당’이다. 볕 받은 갈대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예쁜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리니, 잊고 지낸 강변의 가을 풍경에 눈이 즐겁다. 이러니 섬진강은 꼭 봄에만 찾을 일이 아니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망덕포구까지 달려본다.
섬진강변에는 ‘섬진강 자전거길’이 조성돼 있다. 전북 임실에서 순창, 전남 남원, 곡성, 구례 지나고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광양의 망덕포구까지 연결된다. 마니아들은 애초에 자전거 챙겨 종주에 나서기도 하지만 여행길에 들른다면, 잠깐씩 차를 멈추고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으며 즐긴다.
섬진나루터와 돈탁마을은 찾아본다. 매화마을 인근 섬진나루터에서 섬진강 이름이 유래됐다고 전한다. 섬진강은 원래 다사강, 모래내, 두치강 등으로 불렸다. 고려 말 왜구들이 강 하구로부터 침입했는데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섬진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자 이들이 놀라서 도망갔단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자를 써 섬진강으로 불렸단다. 진월면 돈탁마을에서는 마을 앞 소나무 숲을 구경한다. 수령 200년이 넘은 소나무 1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룬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수상한 이력도 가진 멋진 숲이다.

망덕포구에서는 1908년 황벽학 의병을 이끌고 어업권을 침탈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백운산에서 의병을 결성하는 그는 망덕포구의 어장을 침탈한 일본 어민과 잡화상을 공격해 이들의 가옥과 어선을 불태웠다. 포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은 시인 윤동주와 인연이 깊다. 윤동주는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자필 시집 여덟 부를 만들어 한 부를 그의 절친한 벗인 정병욱에게 맡기고 1945년 2월 일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역사는 치열한데 가을 포구의 풍경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해가 넘어갈 때쯤이면 구봉산에 도착한다. 광양만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가운데 보이는 이순신대교와 여수 묘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남해, 오른쪽 여수가 바라보인다. 날이 맑은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격전지가 보이고 멀리 지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 시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컨테이너 가득 들어찬 광양항의 야경은 또 어찌나 화려한지 단풍 보지 못한 아쉬움이 금새 떨어진다. 구봉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여수나 남해에서 봉화를 받아 전주나 순천으로 전했단다. 봉수대 있던 자리에는 광양을 상징하는 매화 조형물이 들어섰다. 광양제철소에서 만든 제철로 만들었다는데 여느 것과 달리 조잡하지 않고 주변 풍광과 멋지게 어우러진다.
감 익는 정겨운 마을이 있고 코스모스 활짝 핀 섬진강이 있고 단풍보다 멋진 야경이 있는 광양에 가을 서정 만끽할 수 있는 풍경들이 참 많다.
●여행메모
남해고속도로 광양IC로 나오면 백운산이 가깝고 진월IC로 나오면 망덕포구가 가깝다.
백운산 참숯으로 굽는 광양불고기가 별미다. 양념에 미리 재워두지 않고 즉석에서 양념을 해 석쇠에 구워 먹는 것이 광양불고기의 특징이다. 광양읍내 서천변에는 시내식당(061-763-0363)을 비롯해 광양불고기집이 많다. 광양읍사무소 뒤편 금목서회관(061-761-3300)도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곳. 고기 육질이 좋고 밑반찬이 푸짐하고 정갈하다.
광양읍내 왕창국밥(061-762-9186)은 국밥으로 소문난 곳. 돼지고기 넣고 진하게 끓인 육수가 담백하고 구수하다. 옥룡면 운암사 입구에 있는 옴서감서(061-762-9186)는 피리탕을 맛볼 수 있는 곳. ‘피리’는 피라미의 사투리다. 하천에서 직접 잡기 때문에 미리 주문해야 한다. 진월면에 있는 청룡식당(061-772-2400)은 섬진강 특산물인 재첩을 이용한 음식들이 맛있다.
광양읍에 있는 필레모관광호텔(061-761-8720)은 시설이 깨끗해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묵기에 적당하다. 광양시 관광과 (061)797-2731
광양=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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