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는듯한 눈빛으로 출연자들을 바라보는 그녀는 매우 친절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아, 한국인이었나 보구나. 얼른 반가운 마음에 “한국 분이세요?” 라고 묻는데 “아니요. 저는 일본사람 입니다” 라는 답이 돌아오니 순간 당황스럽다.
다음날 아침 낯선 누군가로부터 카톡이 날아든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파이팅!” 그녀였다. ‘겨울연가’ 때문에 좋아하기 시작해 한국 드라마를 보며 우리 말을 익혔고 이제 달에 한 두 번은 꼭 뮤지컬을 보러 온다는 쿠미코. 토크콘서트까지 찾아 다니는 그녀가 주로 K-팝을 소개하는 극장에서 일하는 친구와 함께 왔다. 일본에서 만나고 온지 꼭 한달 만에. 그리고 얼마 전 축구경기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폭우가 내려 꼬박 4시간 퍼붓는 비를 다 맞으며 봤다는 SM 콘서트 출연 가수들 이름을 줄줄이 쏟아낸다.
한국사랑이 이렇게 지극해서였을까? 부산하게 무대 뒤를 오가는 출연자들을 살뜰하게 살펴주던 그녀의 연락이니 냉큼 달려나가 인사동 골목 안쪽 어느 맛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 시간 반 여, 장맛은 일품이지만 요란하지 않은 상을 앞에 두고 앉아 지난달 있었던 예술제에서 “한국팀이 제일 좋았다”는 결론을 내고 예약한 공연을 보겠다며 총총히 멀어져 간다.
공연예술 관계자들에게 매년 10월은 전쟁 같은 달이다. 어떤 이에게는 화살처럼 날아가는 시간이 그러나 누군가 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통과하듯 더디 갈 터. 분초를 갈라 길게 쓰는 시간이 잠시 눈 붙이는 새벽녘에만 도망치듯 후딱 가버리니 손꼽아 폐막을 기다리며 축제를 시작하는 마음이 제대할 날만 학수고대하는 군인들의 심정과 같을까?
시청률이 가장 낮은 예능 프로그램만큼의 인지도도 얻지 못한 것들이지만 다양한 공연예술국제행사가 10월이면 집중적으로 열린다. 그리고 행사 하나에만도 이런저런 이유로 입국한 외국인이 수백 명에 이르러 공연장 로비는 화려한 색을 뽐낸다. 개중에는 오랫동안 사귀어 자매라 부르게 된 벗도 있고 다음 달에는 또 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며 가는 친구도 있다. 그러니 이 시간은 분명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분주하게 고단하지만 한번 더 끌어안고 밥 한끼, 차 한잔 앞에 놓고 한마디 더 나누어 좋은 벗이 멀리에서 찾아와줘 즐거운 그런 시간일 게다.
그러나 잔칫상도 과하면 소화불량을 낳는 법. 동서남북에서 흰 지단을 얹은 접시와 노란 지단을 올린 대접이 서로 봐달라 외쳐대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게다가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가득 그릇을 올린 요란한 상에서 정작 젓가락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많은 외국인들, 특히 한국 공연을 자국으로 가져가겠다고 오는 전문 프로그래머들이 아트마켓을 통해 동 기간 집중적으로 방한하기 시작해 10년. 그러는 동안 창작자들은 들고나가기 쉬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고 외국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라 생각되는 것을 꿰어 맞춰 팔려나가야 한다는 일종의 유행 혹은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게 됐다.
나는 이런 공연예술 작품을 팔기 위해 새벽부터 밤중까지 친구이고 파트너인 이들과 웃고 떠들며 벗을 사귀느라 전쟁 같은 10월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채 뜸도 들지 않아 설익은 밥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봐도 엇비슷한 반찬을 수십 가지 내놓는 상이 멀리에서 온 벗의 걸음을 돌려버리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내용보다 의욕이 앞섰던 초기 케이블 방송을 보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나 하나일까?
드라마와 노래에 반해 훌륭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일본에도, 멀리 루마니아에도 있다. 우리와 정반대 시간을 사는 남미 시골 소녀들은 “슈퍼주니어가 최고”란다. 공연을 사가겠다고 오는 친구들은 한국공연예술계 지형을 파악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매력적인 시장이지만 덜 세련된 중국, 쓰나미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일본에 반해 매우 역동적인 한국인데 정작 도로 위에서는 조금 다른 듯 동일한 계열 색의 차들이 질세라 앞만 보고 달린다. 자 이제 숨 한번 고르며 기쁘게 벗을 맞을 준비를 하자. 그리고 향신료는 맛보았으니 깊은 맛의 장을 내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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