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자고 나면 들어서는 거대한 건물들이 호황을 맞이한 보험사나 증권사에 뒤지지 않는다. 대학들이 해마다 쌓는 돈도 천문학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구조조정, 또는 사실상 폐쇄 절차에 들어간 일부 대학의 어려움에도 아랑곳없이 이들 대학은 불패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이들 대학들은 글로벌 차원에서 진행되는 대학 평가와 경쟁에 대비하기 위해 건물을 올리고, 돈을 쌓아두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게 호들갑인 것만도 아니다. 지난달 영국의 대학평가기관인 QS가 전 세계 주요대학의 순위를 발표하더니, 이달 초엔 타임스 고등교육 세계대학순위(THE)가 전해졌다. 1990년 중반부터 대학을 평가해 온 한 언론사를 비롯해 국내 언론사들도 다투어 대학 평가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대학들은 몸살을 앓는다.
언론사가 대학 평가에 나서는 명분은 그럴 듯하다. 대학도 교육 연구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인 만큼, 고객 만족을 위해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드러내놓고 장삿속을 앞세우는 평가 기관은 없다. 하지만 상업 언론사들이 다투어 대학 평가에 나서는 이면에 돈이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계산이 없을 리 없다.
동기야 어쨌든 이들이 결과를 발표한 뒤 훈수하는 대학 교육의 방향은 무게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올해 타임스 대학 평가에서 국제화 지수가 낮아 국내 대학의 순위가 일제히 뒷걸음질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영어 강의 과목을 늘리고, 외국인 학생과 교수를 늘리고, 국제 저널 논문 쓰기에 더욱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이 훈수에 따라 대학들은 다투어 영어 강의를 늘리고, 건물을 짓고, 외국인 교수와 학생을 선발하고, 교수들의 논문 생산을 독려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래서 대학과 대학의 학문이 살아났는가.
대학 평가라는 말이 나온 것은 미국의 주간지인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가 대학 순위를 처음으로 발표한 1980년대 중반이다. 대학이 자산 경쟁, 학생 만족도 경쟁을 벌이면서 순위를 높이는데 몰두한 것도 이 때부터다. 순위 상승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인문 교양과 문화예술 과목 등을 줄이는 대신 카페나 식당 같은 위락 시설의 확충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대학 평가의 명분은 고객 만족이었지만, 기실은 베트남전 당시 반전 평화 운동으로 애를 먹은 보수의, 진보에 대한 반격, 또는 보복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대학 평가야말로 대학을 기업화하면서 대학에 근거를 둔 진보 비판 세력을 무력화한 일등 공신인 까닭이다. 이 같은 진단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 경쟁력이라는 구호를 그 본산인 미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국내 대학에 적용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이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대학 평가로 인한 그늘이 짙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잃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시각도 설득력이 있다. 학문 연구와 교수의 자유라는 대학의 본령을 해치면서 서열화만 고착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 평가가 시작된 이후 기존의 대학 서열만 더욱 공고해졌을 뿐, 대학 교육이 개선됐다는 증거는 없다. 최근 일부 대학의 총학생회가 평가 거부에 나선 것은 그 부작용이 학생들이 피부로 느낄 만큼 커졌다는 것의 다른 말일 수 있다.
대학 평가에 대한 비판의 초점을 인문학에 집중할 경우 문제는 더욱 근원적이다. 인문학 위기가 초래된 가장 큰 책임은 대학 평가에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인문계와 예술계 학과를 위한 평가 기준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것이 쉬울 리 없다. 대학 평가 자체가 반인문학적인 탓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아야 할 대학의 본령은 진리 탐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이상을 견지할 수 있는 대학은 거의 없다.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우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상적인 대학을 꿈꾸는 건 불가능해졌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대학다운 대학이 가능하다면 이는 평가와 경쟁에서 자유로운 채 이상을 추구하는, 대학 밖의 대학일지도 모른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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