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야첨재(朝野僉載)라는 역사서가 있다. 조선 태조 때부터 조선 숙종 46년(1720) 때까지의 일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낙천집(樂泉集)과 국조인물지에는 저자가 윤형기(尹衡器)로 되어 있고,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 별집의 야사목록(野史目錄)에는 윤득운(尹得運)으로 되어 있으며, 규장각목록에는 윤형성으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저자를 알 수 없다. 조야첨재에는 조선과 중국의 각종 역사서는 물론 여러 문집과 지방지(地方誌)와 금석문(金石文)까지 광범위하게 인용되어 있어서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풍년과 흉년을 예측하던 방식들이 여럿 실려 있다. 춘하추동 어느 때이든 갑자일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갑을병정(甲乙丙丁…) 순서인 10개의 천간(天干)과 자축인묘(者丑寅卯…) 순서인 12개의 지지(地支)를 천간지지(天干地支), 줄여서 간지(干支)라고 하는데, 그 첫 번째 조합인 갑자일(甲子日)에 비가 오면 해롭다는 것이다. 즉 “봄 갑자일에 비가 오면 붉게 된 땅이 천리에 걸쳐 있고(春雨甲子 赤地千里), 여름 갑자일에 비가 오면 배를 타고 시장에 가고(夏雨甲子 乘船入市), 가을 갑자일에 비가 오면 벼에서 싹이 나고(秋雨甲子 禾頭生耳), 겨울 갑자일에 비가 오면 까치둥지가 땅으로 내려온다(冬雨甲子 鵲巢下地)”는 것으로서 모두 흉년에 관한 조짐이다. 조야첨재에는 거꾸로 음력 섣달에 눈이 오면 풍년이 들 조짐으로 여겼다. “섣달에 눈이 와서 천지가 세 번 하얗게 되는 것을 보면, 농부가 껄껄대며 웃는다”는 것이다. 동지 이후 세 번째 술일(戌日)에 지내는 제사가 납제(臘祭)인데, 납제 전에 세 차례 눈이 내려서 천지가 세 번 하얗게 되는 삼백(三白)이 되면 풍년이 든다는 것인데, 이를 납전삼백(臘前三白)이라고 한다. 그러니 농부가 껄껄대고 웃는다는 것이다. 중국 명(明)나라 때 학자 이시진(李時珍ㆍ1518~1593년)이 저술한 의서(醫書)인 본초강목(本草綱目)의 ‘납설(臘雪)’조에도 “동지(冬至)가 지난 후 세 번째 술일(戌日)인 납일 이전에 세 번 눈이 오면 보리농사에 아주 좋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본초강목은 조선 선조(宣祖ㆍ재위 1567∼1608년) 이후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고려 후기의 학자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의 시 중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은 본초강목의 영향으로 생긴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규보는 ‘무술(戊戌)년 정오 15일에 큰 눈이 내리다’라는 시에서 ‘밭이랑의 푸른 빛을 볼 수 있다면/어찌 납일 전에 흰 눈이 오기만 기다릴 것인가’라고 노래했다. 조선에서는 동지 후 세 번째 미일(未日)에 종묘와 사직에서 납향(臘享)이라는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납평제(臘平祭)라고 했기에 민간에서는 이날을 ‘납팽날’이라고 불렀다. 납향제를 미일(未日)에 지낸 것은 조선이 동쪽 방향인 동방(東方)에 있는데, 음양오행 중 목(木)이 동방에 속하기 때문에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는 미일(未日)에 제사를 지냈다는 설과 동방은 본디 곳간이 미방(未方)에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 사람들이 납향제를 얼마나 크게 중하게 여겼는지는 납향 때 내린 눈을 녹여서 살충(殺蟲)이나 해독약으로 사용한데서 알 수 있다. 이를 납설수(臘雪水)라고 하는데, 산림경제(山林經濟) ‘구급(救急)’편에는 갑자기 미쳐 날뛰는 졸전광(猝癲狂)에 대한 처방 중에 “지룡(地龍ㆍ지렁이) 10여마리를 문드러지게 갈아서 생강즙, 백하즙, 꿀을 각각 한 숟갈씩 넣어서 우물물에 타서 마신다”는 처방과 함께 “납설수를 많이 마시게 한다”는 내용도 있다. 납향 때 눈이 오면 풍년이 들 조짐이므로 그만큼 상서롭게 여겼던 것이다.
풍년 중에서 기장과 벼가 모두 잘 여문 것을 최고의 풍년으로 쳤다. 시경(詩經) ‘주송(周頌)’ ‘풍년조’에는 “풍년에는 기장도 많고 벼도 많다”는 구절이 있다. 그 주석에 “기장은 높고 건조하고 추운 곳에서 잘되고, 벼는 낮고 축축하고 더운 곳에서 잘되니, 기장과 벼가 다 잘 익었다면 모든 곡식이 다 잘 여문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곡식이 잘 되는 풍년이 최고의 풍년이었다. 이런 해를 대유년(大有年)이라고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6년조에 “겨울에 큰 풍년이 들었다(冬大有年)”라고 쓴데서 유래한 말이다. 전북 남원 출신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 ‘선조 19년(1586년)’조에는 “이해는 대유년(大有年)이어서 무명 한 필 값이 쌀 두 섬에 이르렀다”라는 구절이 있다. 올해 농사도 풍년이라는데, 농민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고 한다. 쌀 수확량이 많아져서 산지 쌀값은 하락하고, 정부의 쌀 관세화 발표에 농심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농경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신했지만 풍년에도 울상이며 구조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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