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피그를 키우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후 여섯 살 아이는 도화지에 당근을 그렸다. 자신도 토끼 같은 걸 키워보고 싶다고 했다. 도화지 가득 커다란 당근 여섯 개를 그리고 토끼는 조그맣게 한 마리 그렸다. 토끼는 좋겠다. 배부르겠다. 살지겠다. 고민이 없겠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당근을 그리고 당근의 뿌리도 그려주었다. 아이에게 당근은 열매쯤 되고 뿌리가 따로 필요했나 보다. 꽃이나 나무를 그릴 때 늘 뿌리까지 함께 그려주는 아이가 신기했는데 이번에는 너무 웃겼다. 당근의 뿌리라니.
다른 동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이 살 집과 먹이를 항상 같이 그린다. 새를 그리면 애벌레를, 애벌레를 그리면 다시 나뭇잎을 그려준다. 춥다며 옷이며 이불을 그려주기도 한다. 또 종이를 길게 잘라서 여러 가지 연속무늬를 그리더니 스타킹이라고 한다. 스타킹 신은 따뜻한 다리라고 한다. 몸 없는 여러 개의 따뜻한 다리를 착실히 모아서 가지런히 접어놓았다. 뿌듯한 것처럼 보였다. 그림은 엉망이지만 아이의 그런 모습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떼쓰고 울어도 조금 더 참아주고 싶은 사랑스런 아이다. 공주를 완벽하게 그리거나 풍경을 그럴듯하게 그리지 못해도 좋다. 색칠을 엉망으로 해도 상관없다. 마음의 가난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다른 이의 가난한 마음을 보듬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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