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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한국 금융의 미얀마 치욕

입력
2014.10.1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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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은 '금융 치욕의 날'이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대형 은행들이 실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지겨울 정도로 들어왔던 정부의 금융 글로벌화 정책은 또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날이었다. 선진금융의 메카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수모를 당한 게 아니었다. 런던, 도쿄도 아니었다. 아시아의 작은 개발도상국인 미얀마에서였다.

이날 미얀마 정부는 그 동안 외국계 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벌여온 금융업 허가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얀마 중앙은행으로부터 예비인가를 받아 제한적으로나마 앞으로 금융영업을 할 수 있게 된 외국국적의 은행들은 총 9개. 일본계가 미쓰비시도쿄UFJ, 스미토모미쓰이, 미즈호 등 3개로 가장 많고, 싱가포르가 OCBC와 싱가포르은행 등 2개, 그리고 중국(공상은행) 태국(방콕은행) 말레이시아(메이뱅크) 호주(ANZ)가 각 1개씩이었다.

이 리스트에 한국계 은행은 없었다. 국내 최대규모인 국민은행과 신한은행, 그리고 기업은행 등 3곳이 도전장을 냈고 25개를 추린 후보그룹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끝내 모조리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야말로 얼굴을 들 수 없는 완패이자 전멸이었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신한은행과 기업은행은 작년 4월, 국민은행은 작년 9월 미얀마에 지점 승격을 염두에 두고 사무소를 냈다. 은행장들도 미얀마를 찾아가 금융당국 최고위층을 면담하고 현지 금융기관들과 제휴를 맺었다. 물적 기부도 했고 현지 금융인들을 초청해 연수기회도 제공했다. 금융위원장 역시 미얀마를 방문, 당국자들과 만나 국내 은행들의 영업라이선스 발급을 측면 지원했다.

하지만 들인 공은 상대적인 법. 승리의 타이틀은 언제나 더 많이 쏟아 부은 쪽이 차지한다.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야 미얀마와 같은 아세안 회원국이자 인접국으로 관련 비즈니스가 많으니까 그렇다 치자. 중국 역시 역내 지배력을 감안할 때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이상할 것은 없다. 호주ANZ는 미얀마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인프라금융의 강자라는 점이 크게 어필했을 것이다.

주목할 곳은 일본계 은행들이다. 9장 라이선스 가운데 무려 3분의 1을 따냈다는 건, 이번 미얀마 금융시장개방이 사실상 '일본을 위한 잔치'였음을 말해준다. 애초 미얀마는 일본의 경제적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연간 3,000만달러의 무상원조를 제공해왔고 지금까지 빌려준 차관만도 총 5,000억엔이 넘는다. 이토추 마루베니 미쓰이 등 간판 종합상사를 필두로 도요타 스즈키 히타치 등 주요 제조업들이 이미 미얀마에 진출해있거나 투자를 준비 중이다. 특히 아베 총리는 지난해 일본 총리로는 36년 만에 미얀마를 방문하면서 채무탕감, 무산원조, 신규차관 등 무려 '1조엔짜리 선물보따리'를 안겼다. 텃밭에 돈까지 쏟아 부었으니 풍성한 결실이 나온 것이다.

미얀마 금융시장은 애초 우리나라에겐 비좁은 문이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처럼 경제권이 같은 것도 아니고, 중국 같은 지역맹주도 아니다. 일본처럼 돈다발을 안길 형편도 아니고, 호주처럼 개발금융이 강한 것도 아니다. 딱히 내세울 게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다른 필살기, 예컨대 전략이나 감동으로 승부를 봤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그마저도 없었다. 고작 1년 전 사무소 하나 세워놓고 은행장 한두 번 다녀간 게 전부인데, 제비뽑기가 아닌담에야 라이선스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모할 따름이다.

자본도 없고, 돈의 열세를 만회할 만한 정보나 전략도 없고, 그렇다고 오랜 시간 정성과 인맥을 쌓아가는 인내도 없고, 게다가 정부의 뒷받침마저 없는 현실. 이게 한국금융의 현주소다. 이런 환경에서 '금융에는 왜 삼성전자가 나오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조차 황당할 뿐이다.

미얀마는 아시아에 남은 마지막 황금시장이다. 2차 금융개방 때 진출이 성사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언제일 지도 모르고, 행여 들어간다고 해도 시장은 다 빼앗긴 뒤가 될 것이다. CEO 자리를 위해 줄대기와 낙하산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실체가 뭔지 모를 '창조금융'만 외치고 있는 사이, 몇 남지도 않는 미개척시장은 이렇게 하나씩 멀어져 가고 있다. 하기야 금융기관과 금융당국이 '미얀마의 실패'를 부끄럽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는 있는지, 그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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