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지음
현실문화ㆍ432쪽ㆍ1만6,500원
한국영화에서 ‘파괴’는 매우 일상적이다. 액션 영화뿐 아니라 스릴러, 드라마, 멜로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수시로 파괴를 일삼는다. 일례로 ‘하녀’에서 전도연이 맡은 은이는 자살하고 ‘황해’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구남의 몸은 완전히 으스러지며 ‘박쥐’의 두 흡혈 남녀는 종국에 동반자살을 감행한다. 최근 개봉한 ‘해무’에선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영화평론가 김소영씨는 이런 영화를 ‘재난영화’라고 정의한다. 자연재해나 대형사고, 전쟁을 소재로 삼는 기존 재난영화와 달리 파괴의 악순환을 자양분으로 삼는 영화, 헐벗은 타자의 삶을 부수며 파국의 생태계를 일구는 영화가 재난영화인 것이다. 이런 영화는 대개 파괴, 죽음, 자살, 파국으로 귀결한다. 김씨는 4년 만에 낸 신작 평론집 ‘파국의 지도’에서 재난영화를 통해 현재의 한국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충동, 즉 생존을 향해 다급하게 질주하는 모습과 그런 사회적 충동에 균열 내는 모습을 함께 읽어낸다.
저자는 한국의 비상사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1960~80년대 정치적 비상사태 아래 강력한 산업화를 이끈 동력인 ‘시급함’의 국가 정서가 여전히 남아 정서적 비상사태로 이름을 바꿔 우리 사회의 무의식을 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뿐 아니라 TV 속 예능 프로그램 대부분이 ‘서바이벌’을 서사의 중심 축으로 다루고 있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저자는 최근의 한국영화가 다양한 타자를 등장시켜 어떤 파국의 지형을 그리며 위급한 정서를 관객의 뇌리에 심는지 이야기하는 한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60~70년대 정치적 비상사태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재앙이라 할 만한 현실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핀다. 1920~30년대 한국영화에 드러난 경계의 정치성, 1960년대 이후 동아시아 타 지역과 네트워킹 속에서 만든 영화의 탈민족주의적 측면을 읽어내기도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기술이 중요한 부분을 누락했다면서 만민공동회의 개최 시점인 1898년과 유럽 최초의 영화 상영 시점인 1895년이 인접해 있는 걸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제국 당대의 중요 사건들과 그 정치적 의미를 영화사 안으로 들여오려면 한국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서 만민공동회와 초기 영화의 관계를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타자로서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회적 계층이 참가했던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한국 영화사를 수정함으로써 지금의 한국 영화가 어떤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 조심스럽게 제언한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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