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냉전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추구하는 미국과 서구 국가들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의 외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90년 9월 구소련과의 수교는 물론 북한과의 특수관계로 인해 일본(72년)과 미국(79년)에 비해 한참을 뒤쳐졌던 중국과의 수교도 92년 8월에 성립됐다. 당시 ‘북방외교’로 명명된 한국정부의 노력도 있었으나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일초다극(一超多極)의 구조 하에서 얻어지는 외교적 이득도 많았다. 이후 한국은 안보적인 면에서는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동맹관계로, 경제적인 면에서는 떠오르는 중국과의 우호협력관계로 국가발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중국도 북한과는 정치를 중심으로 한국과는 경제를 중심으로 한반도 정책을 펴나갔으며, 이런 한국과 중국의 외교정책에 미국도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안보와 경제 이익을 각각 추구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90년대 이후 중국은 개혁ㆍ개방정책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부상을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이를 새로운 발전의 기회로 보는 한편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중국 위협론’도 등장했었다. 하지만 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을 겪으며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위는 여전히 튼튼해 보였다. 중국 또한 미국과 서구 강대국들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와 규범에 편입해 가며 자국의 이익을 증가시켜 나갔다. 한국은 2000년대 초 반미감정과 ‘동북공정’으로 미중과 갈등도 겪었으나 북한의 핵위협과 ‘중국 경제특수’를 통해 미중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중국은 GDP 지표상으로 프랑스(2005년), 영국(06년), 독일(07년)을 따라잡았다.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고 2010년 일본을 따라잡으며 마침내 국제사회에서 G2로 불리게 됐다. 미중 사이에 전략적 경쟁의 시대가 시작되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이는 한국의 입장에도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예전같이 안보와 경제를 따로 떼어 미국과 중국을 대할 수도 없으며, 미중의 전략적 경쟁구도 하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몸값 높이기’는커녕 북한의 3차 핵실험, 중일관계의 갈등 등에서 어부지리격인 ‘반사이익’을 즐기는 사이 미중 ‘양자택일’의 도마 위에 놓인 격이 됐다.
이런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고(高)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THAAD)의 한국 내 도입문제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의 한국 가입문제이다. 예전같이 안보와 경제 문제로 나누어 대응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안보와 경제 요인을 떠나 미중은 이를 향후 한국이 자신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누구를 택할지에 대한 시험대로 여기며 한국의 반응을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다.
특히 사드 도입문제에서 미국이 60년 넘게 지속해온 동맹관계를 내세우자 중국은 이에 대한 자국의 군사ㆍ안보적 피해를 설명하며 만약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그간 한중 간에 쌓아온 신뢰를 크게 무너뜨려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다. 중국은 한발 나아가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중 동맹론’까지 거론하고 있다. 옌쉐통(閻學通) 칭화대 당대국제관계 연구원장, 왕이웨이(王義?) 인민대 국제사무연구소 소장, 마카오 대학의 천딩딩(陳定定) 교수 등은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며 중국과의 동맹관계 또는 동맹에 준하는 관계 설정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중국 학계 주류의 시각이나 중국정부의 공식 입장도 아니며, 단지 은연중에 한국을 떠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입장에서는 향후 미중의 이익 충돌 시 중립의 위치를 지키기 보다는 선택의 상황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제 한국은 동북아에서 나타난 미중의 전략적 경쟁, 북한의 3차 핵실험, 중일관계의 갈등 등에서 어부지리 격으로 ‘반사이익’을 즐기던 입장이 아니다. 미중의 적극적인 요구와 전략적 선택의 어려움에 대응하기 위해 선제적인 전략수립과 확고한 외교적 원칙을 세우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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